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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0F 서울 (공포 점수 : ★☆☆☆☆)

6호선과 9호선이 만나는 지점

by 미히

어느 날, 9호선을 타고 김포공항역에 내렸다. 늘 그렇듯 플랫폼을 빠져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파란 제복을 입은 철도공무원이 내 앞에 나타났다.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는 손에 든 작은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축하합니다. 9호선을 99번 횡단하신 분께 드리는 특별 선물입니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의 말이 선명하게 들렸지만, 바로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런 것도 있었나요?"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왔다. 목소리는 담담했고, 질문은 진심이었다. 매일 9호선을 타고 다녔지만 이런 이벤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장난인가 싶어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말없이 상자를 건넸다.


나는 얼떨결에 손을 뻗어 상자를 받았다. 손에 닿는 종이 상자의 감촉은 평범했지만, 묵직한 느낌이 전해졌다. "이게 뭔가요?" 나는 사람들 틈에 떠밀리며 물었다. 김포공항역은 퇴근 시간대의 소란함으로 가득했다. 공항철도와 5호선, 골드라인, 서해선으로 갈아타는 사람들, 비행기를 타러 가는 여행객들이 뒤섞여 있었다. 내 목소리는 그 소음 속에 섞였고, 철도공무원도 어느새 인파에 휩쓸려 멀어졌다.


고개를 돌려 그를 찾아보니, 파란 모자만이 사람들 사이로 언뜻 보였다. 그는 멀리서 나를 향해 엄지를 들어 올렸다. 그 동작은 묘하게도 무언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나는 손에 든 상자를 내려다봤다. 작고 평범한 종이 상자였다.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 궁금해졌다.


3분쯤 지나자, 김포공항역의 혼잡함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환승객들은 각자의 노선으로 흩어졌고, 비행기를 타러 가는 사람들은 게이트로 향했다. 플랫폼이 한산해지면서 나도 손에 든 상자를 들여다볼 여유가 생겼다. 나는 9호선 개화역으로 이어지는 환승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걸으면서 상자를 조심스레 열었다. 종이를 뜯는 소리가 통로에 작게 울렸다.


상자 안에는 열쇠가 있었다. 반쪽짜리 열쇠였다. 금속의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나는 그것을 꺼내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열쇠는 반으로 잘린 듯한 모양이었고, 톱니 모양의 끝이 다른 반쪽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빛에 비추자 은빛 표면이 반짝였다. 하지만 무엇에 쓰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엇을 여는 열쇠지?’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열쇠를 손바닥 위에서 굴려보았다. 개화역으로 가는 열차가 도착했다. 나는 텅 빈 객차에 올라탔다. 창밖으로 터널의 어둠이 스쳐갔다. 나는 열쇠를 다시 한번 자세히 보았다. 반쪽이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열쇠라면 무언가를 열어야 할 텐데,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객차의 규칙적인 덜컹거림 속에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9호선을 99번 횡단했다는 그 공무원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정말 그만큼 탔던 걸까? 매일 무심코 탄 지하철 횟수를 누가 세고 있었던 걸까? 99라는 숫자가 묘하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머지 반쪽은 6호선을 66번 횡단해야 주어지겠구나.’


다음 날 아침, 나는 중앙보훈병원 앞에 자리 잡은 회사로 향하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에 깃든 작은 불씨를 따라 휴가를 신청했다. 손에는 어제 받은 반쪽 열쇠가 쥐어져 있었고, 머릿속에는 6호선과 66번이라는 숫자가 맴돌았다. 그것은 단순한 추측이었지만, 동시에 운명처럼 나를 이끄는 예감이었다. 나는 집을 나서며 결심했다. 이 기묘한 퍼즐의 나머지 조각을 찾아야 한다고.


신내역에서 6호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낯익으면서도 새로웠다. 신내에서 응암까지, 그리고 다시 응암에서 신내까지. 이 끝없는 순환은 6호선의 고리처럼 나를 묶어놓았다. 열차가 덜컹이며 터널을 지나고, 역마다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갈 때마다, 나는 손에 쥔 반쪽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이 반복 속에 답이 있을까?’ 피로가 쌓이고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66번이라는 숫자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마침내 66번째 순환을 마무리한 순간, 응암역 플랫폼에 서서 숨을 고르고 있자니, 갑작스레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축하합니다.” 고개를 돌리니 한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단정한 코트 차림에, 손에는 작은 상자를 들고 있었다. “6호선을 66번 횡단하신 분께 드리는 특별 선물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따뜻했지만, 어딘가 꿈결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나는 얼떨결에 상자를 받아들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현실임을 깨닫게 했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또 다른 반쪽 열쇠가 들어 있었다. 빛바랜 금속빛이 9호선에서 받은 열쇠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첫 번째 열쇠를 꺼내, 떨리는 손으로 두 조각을 맞춰보았다. 톱니가 서로 엇갈리며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맞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환희가 터져 나왔다. 두 반쪽이 하나의 온전한 열쇠로 합쳐지며, 마치 오랜 기다림 끝에 완성된 퍼즐처럼 단단하게 결합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 열쇠가 무엇을 여는지 여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 이 열쇠로 어디를 열어야 하는 거죠?”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플랫폼은 이미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는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붕어빵 봉투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합쳐진 열쇠를 손에 쥔 채,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마음속에는 끝없는 물음이 소용돌이쳤다. ‘이 열쇠로 무엇을 열어야 하는 걸까?’ 창밖으로 스며드는 도시의 불빛이 책상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열쇠를 손끝으로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문득, 6호선과 9호선이 얽힌 여정에서 힌트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환승역이 단서가 아닐까?’ 나는 지하철 노선도를 펼쳐 들었다. 색색의 선들이 얽힌 종이 위에서 눈을 굴리며 6호선과 9호선이 만나는 지점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봐도, 두 노선은 서로 닿지 않았다. 실망감이 묵직하게 가슴을 짓눌렀다.


숨겨진 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나는 자료를 뒤졌다. 역사의 틈새에 잊힌 이름들, 폐쇄된 플랫폼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친 손으로 공책을 집어 들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6과 9를 반복해 써내려갔다. 숫자들이 종이 위에서 춤을 추듯 이어지다, 갑작스레 눈앞에 번뜩이는 깨달음이 스쳤다. 6과 9가 서로 뒤섞이며 하나의 새로운 형태를 그렸다. ‘8이다!’ 두 숫자가 합쳐져 8호선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공책을 책상에 내팽개치고, 숨이 차도록 가까운 8호선 역으로 뛰쳐나갔다.


역에 도착해 손에 쥔 팜플렛을 펼쳤다. 8호선의 24개 역 이름이 빼곡히 적힌 종이를 들여다보며,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중 어디에 열쇠가 맞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히며 욱신거렸다. 단순히 역 이름만으로는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또 하나의 직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8호선을 88번 타면 뭔가 드러나지 않을까?’ 나는 망설일 틈 없이 택시를 잡아 별내역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은 흐릿했고, 내 심장은 미지의 답을 향한 기대로 쿵쾅였다.


별내역에서 모란역까지, 다시 모란역에서 별내역까지. 열차가 선로를 오갈 때마다 나는 창밖을 응시하며 반복의 의미를 곱씹었다. 그러던 중, 낯선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란역행 열차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별생각 없었다. 그러나 별내역으로 돌아오는 열차에서도 그녀가 있었다. 같은 옷차림, 같은 표정. 우연이라 하기엔 기묘한 일이었다. 반복이 거듭될수록 그녀의 존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44번쯤 그녀와 마주쳤을 때, 갑작스레 그녀가 잔잔한 물결처럼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내게 다가왔다. 그녀가 말했다. “혹시 열쇠를 가지고 계신가요?”


그녀의 이야기는 이랬다. 그녀는 까치산에 살았다. 직장은 신설동에 있었다. 그녀는 2호선을 타고 다녔다. 강북 노선으로 갈 때도 있고, 강남 노선으로 갈 때도 있었다. 때로는 까치산에서 신도림까지 가다 환승을 해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또 어떤 날은 강남 방향으로 내려가 잠실을 지나 성수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그 긴 고리를 따라 움직였다.


내가 말했다. “5호선을 타면 더 빠를 텐데요.” 까치산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면 신설동까지 직선처럼 이어진다. 시간도 절반으로 줄어든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오른쪽 어깨가 살짝 내려가며 머리카락이 얼굴 옆으로 흘렀다. “회사 가는 길을 여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녀가 말했다. “여행인데 빨리 갈 필요가 있나요. 가고 싶은 길을 가는 게 여행이죠.”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히 흘렀다. 플랫폼에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말 끝이 살짝 묻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딱히 반박할 건 없었다.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어느 날 퇴근길, 까치산역에서였다. 해가 저물고 역 안 간판 불빛이 흐릿하게 깜빡이던 때였다. 철도공무원이 그녀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파란 제복을 입은 남자였다. 모자 밑으로 눈썹이 살짝 보였다. “2호선 모든 역을 22번 지난 분께 드리는 선물”이라고 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손에 들려진 건 작은 상자였다. 안에는 반고리 모양의 쇠봉이 있었다. 빛바랜 금속이었다. 손에 쥐자 차갑고 묵직했다. 그녀는 그걸 받고 궁금했다고 했다. “뭐지, 이게?”라고 혼잣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며칠간 용도가 뭔지 고민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집에 돌아가 책상 앞에 앉아서 그 쇠봉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불을 켜놓고, 손끝으로 표면을 문질렀다. “공책에 2를 222번쯤 썼을 거예요.” 그녀는 손으로 공책을 넘기는 시늉을 했다. 펜을 쥐고 숫자를 반복해서 써내려갔다. 2, 2, 2. 종이가 까맣게 채워질 때까지. 그러다 문득 멈췄다. 그녀가 웃었다. 나도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 단순한 행동이 왠지 이해가 갔다. “그러다 깨달았어요. 2를 뒤집으면 5가 되더라고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2를 그렸다. 거꾸로 돌리자 5가 됐다. “믿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이번에는 5호선의 모든 역을 55번 지나가보자고 결심했죠.”


“5호선은 행선지가 두 곳이잖아요.”
내가 말을 끼어들었다. 플랫폼의 소음이 잠잠해진 틈을 타서였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잔잔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곧 터져 나올 것처럼 반짝였다. 나는 손에 쥔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네, 맞아요. 그래서 저는 정확히 55번을 반복했어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차분했지만, 그 속에 묘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먼저 시도한 것은 방화역에서 상일동역까지 였어요.그렇게 55번을 반복하자, 상일동역에서 한 남자가 작은 철제 박스 반쪽을 제게 주었죠. 방화역에서 마천역까지 55번을 반복하였을 때는 남은 철제 박스 반쪽을 갖게 되었구요. 그걸 모두 조립하니, 이처럼 자물쇠가 되었지요."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빛바랜 금속빛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그녀가 자물쇠를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조립되자마자 잠겨버렸다는 거예요.”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저는 또 고민에 빠졌어요. 이 자물쇠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열쇠가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밤새 책상 앞에 앉아서 공책을 펼쳤죠. 펜을 들고 2와 5를 반복해서 써내려갔어요. 77번쯤 그렸을 거예요. 숫자들이 종이 위에서 뒤엉키며 춤을 추는 것 같았죠.”


그녀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숫자를 그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어요. 2와 5를 겹쳐 쓰면 8이 되더군요.” 그녀의 목소리에 신이 난 기색이 묻어났다. “그 순간 머릿속이 번쩍했어요. 그래서 8호선을 88번 타려고 결심했죠. 그런데 그때 당신을 본 거예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여정이 내 여정과 얽히는 지점이 점점 선명해졌다. “그랬군요…” 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저는 열쇠를 받았어요. 처음엔 9호선을 99번 타고 김포공항역에서 반쪽을 받았죠. 그리고 6호선을 66번 순환한 끝에 나머지 반쪽을 손에 넣었어요.”


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두 반쪽이 합쳐진 완전한 열쇠가 손바닥 위에서 은빛을 발했다. “사실 저는 이 열쇠가 뭔가 대단한 걸 여는 열쇠라고 상상했어요. 서울 어딘가에 숨겨진 지하 통로로 들어가는 입구라든가, 잊힌 역의 비밀 문이라든가… 그런 모험의 시작일 거라고요.”


내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녀의 눈빛이 내 표정을 살피는 듯했다. “하지만 당신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냥 대중교통 활성화를 위한 기념품이었나 보네요.” 나는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웃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가 내민 열쇠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자물쇠에 조심스레 맞춰보았다.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딸깍.’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플랫폼의 고요한 공기를 깨뜨렸다. 자물쇠가 열리며 반으로 갈라졌고, 그녀의 손에서 툭 떨어졌다.


"이렇게 된 거, 저희 남산에 자물쇠 달러 갈까요?"

내가 툭 내뱉듯 말했다.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뒤로 펄쩍 뛰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 남산N타워 말씀이시죠?"


"네, 맞아요. 기념품이라면 제대로 기념을 해야죠." 내가 덧붙였다. "이제 당신은 자물쇠를 열 수 있게 됐고, 저도 제 열쇠로 열 수 있는 자물쇠를 찾았잖아요."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좋아요. 그럼 곧 천호역이니까 5호선으로 갈아타고, DDP역에서 4호선으로 갈까요?"

"좋아요. 케이블카 타요. 남산케이블카 타본 적 있으세요?" 내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뇨, 서울 사람인데도 남산을 제대로 가본 기억이 없네요. 이상하죠?"

"저는 어렸을 때 부모님 손잡고 남산돈까스를 먹으러 간 기억은 있는데, 자물쇠를 걸어본 적은 없어요." 내가 추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명동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회현사거리까지 걸어가는 동안 그녀는 서울에 대해 이야기했다. "저는 한강 자전거길이 좋아요. 바람 쐬며 페달 밟는 기분이 최고거든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넘쳤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며 걷는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평일이라 남산케이블카는 한산했다. 우리 둘뿐인 객차에 올라타자 그녀는 창가 자리에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케이블카가 천천히 올라가며 서울 도심이 점점 멀어질 때, 그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아이처럼 신난 표정을 지었다. "와, 저기 한강 보이네요! 저녁에 불빛 반사되면 진짜 예쁘잖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객차 안을 채웠다. 나는 그녀의 그 순수한 기쁨에 덩달아 미소가 번졌다.


남산서울타워에 도착해서 우리는 자물쇠를 걸었다. 난간에 자물쇠를 채우며 그녀가 말했다. "우리 이름이라도 써놓을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펜을 건넸다. 그녀는 자물쇠에 조그맣게 날짜와 이니셜을 적었다. 그러고 나서 열쇠 수거함 앞에 서서 나를 돌아봤다.

"여기에 열쇠를 두면 되죠?"

"네, 맞아요. 전통이니까요." 내가 대답했다. 그녀는 살짝 망설이다가 열쇠를 수거함에 떨어뜨렸다. 철컥 소리와 함께 우리의 작은 약속이 남산에 남겨졌다.


타워를 나와 우리는 해방촌으로 내려갔다. 골목 끝자락에 자리 잡은 루프탑 카페에서 저녁을 먹으며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봤다. 불빛으로 반짝이는 도시는 눈부셨다. 그녀는 와인 잔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진짜 특별한 날이에요." 나는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속으로 동의했다. 그날 밤, 그녀는 내 눈에 유난히 예뻤고, 그 순간이 영원히 기억에 남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사귀기 시작했다. 지하철 끝과 끝을 오가며 자물쇠와 열쇠를 찾던 그녀와 나는 연애를 거쳐 결혼했다. 요즘은 골드라인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는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옆방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다. 문득 그녀의 잠든 얼굴을 떠올리며, 그날 남산에서 시작된 우리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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