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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원 (공포 점수 : ★☆☆☆☆)

THE CUT

by 미히

1만 4,400명을 태울 수 있는 초호화 여객선이 선착장에 우뚝 서 있었다. 거대한 선체는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였고, 그 위용은 마치 바다를 지배하는 왕처럼 당당했다. 이 배는 세계적인 부호 리치맨이 소유한 것으로, 북극으로의 꿈같은 항해를 약속하며 전 세계에서 추첨을 통해 승객을 모집했다.


선착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저마다 들뜬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퍼졌다.

"북극이라더군. 북극고래를 꼭 보고 싶어!"

"오로라가 하늘을 수놓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추첨에 당첨된 이들은 설렘과 기대를 안고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넘쳤고, 손에는 소박한 여행 가방이 들려 있었다.


“아, 잠시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승무원이 단호한 걸음으로 강단 위에 올라섰다. 그의 뒤로는 ‘승선을 축하합니다’라는 대형 현수막이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마이크를 손에 쥐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죄송하지만, 승선 인원이 줄었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순간, 군집 속에서 소란이 일었다.

"뭐라고?"

"갑자기 무슨 소리야?"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엉키며 선착장은 혼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승무원은 손을 들어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이 배는 리치맨님의 소유입니다. 어제 저녁, 리치맨님이 성대한 파티를 여셨는데, 그 자리에서 오늘 출항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파티에서 북극행에 동참하고 싶다는 지인 132분이 나타났습니다. 모두 세계 최고의 부호들이라, 각자 수행원 100명을 데려오실 거고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승선 인원을 10분의 1로 줄이게 되었습니다.”


선착장은 다시 한번 술렁였다. 분노와 실망이 뒤섞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뭐야, 그럼 우리 꿈은 어떻게 되는 거야?”

“추첨까지 했는데 이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야!”


몇몇 사람이 소란을 진정시키려 나섰다.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공짜로 이 배를 타려던 거잖아요? 이런 변수는 감수해야죠.”

그 말에 일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불만의 불씨는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승무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1월 17일입니다. 그러니 1만 4,400명 중 번호 끝자리가 9인 분들만 승선하시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배의 한쪽 면이 거대한 전광판으로 변하며 끝자리 9번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새로 참가하시는 부호님들 중 짐을 꾸릴 시간이 필요하다는 분이 계셔서, 출항은 내일 아침 9시로 연기되었습니다. 다시 모여 주세요.”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흩어졌다. 안전요원들이 그들의 발걸음을 정리하며 질서를 유지했다. 선착장은 순식간에 텅 비었고, 바람만이 쓸쓸히 현수막을 흔들었다.


다음 날 아침 9시, 끝자리 9번 티켓을 가진 1,440명이 다시 선착장에 모였다. 그들은 어제의 혼란을 뒤로하고 다시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제와 같은 승무원이 강단에 올라섰다. 그의 표정은 어색한 미소로 굳어 있었다.

“승선을 위해 모인 여러분께 양해를 구합니다. 어제 하루 시간을 요청하신 한 부호께서 늦잠을 주무셨습니다. 그래서 출항은 오후 3시로 미뤄졌습니다.”


여기저기서 한숨과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게 뭐야, 장난하나?”

“하루를 더 기다리라고?”


승무원은 손을 들어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부호 중 한 분이 북극기지를 소유하고 계신데, 이번 기회에 그곳에서 발굴된 귀중한 연구 자료를 싣고 돌아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일반 승객 수는 144명으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선착장은 침묵으로 얼어붙었다. 당혹감과 분노가 사람들 사이를 맴돌았다.

“144명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1만 4,400명에서 이제 144명이라고?”


승무원은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편리하게도, 오늘 일찍 선착장에 도착하신 순서로 144명을 선발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전광판에 144명의 이름이 떠올랐다.


한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보세요, 우리도 공짜로 온 게 아니에요! 여기까지 오는 교통비, 숙박비, 다 썼다고요!”

그러자 다른 이들도 가세했다.

“맞아요, 저는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성수기라 티켓 구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이제 돌아갈 비행기는 어떻게 구하라는 거죠?”

“이건 터무니없어요! 우리도 비용을 들였단 말이에요!”


승무원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안타깝지만 개인 운송 수단까지 지원할 수는 없습니다. 이 배의 티켓 가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여러분이 꿈도 꾸지 못할 금액이죠. 리치맨님의 지인들은 모두 정당한 티켓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분들의 편의를 우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안전요원의 유도에 따라 사람들은 떠나갔다. 선착장은 다시 고요해졌고, 144명만이 남아 오후 3시를 기다렸다.


오후 3시, 최종 선발된 144명이 선착장에 다시 모였다. 그들의 눈에는 설렘과 긴장이 뒤섞여 있었다. 드디어 북극으로 떠날 순간이 다가왔다고 믿었다.


승무원이 앞으로 나왔다.

“최종 144분께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짐이 꽤 많아 보이네요.”


한 남자가 반박했다.

“80일간의 긴 여행인데, 옷가지라도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승무원은 고개를 저었다.

“배에는 모든 먹거리, 옷가지, 즐길 거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맨몸으로 타시면 됩니다. 짐을 추가하면 탑승 인원이 더 줄어들게 됩니다.”


“그럼 짐을 놓고 타야죠. 휴대폰은 괜찮겠죠?”

누군가 물었다.


“휴대폰도 안 됩니다.”

승무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사진은 어떻게 찍어요?”

“사진은 저희가 찍어드립니다.”

“그럼 개인 시간에는 뭘 하죠?”

“배 안에는 다양한 즐길 거리가 있습니다. 자는 시간, 먹는 시간, 전기와 수도 사용에는 제한이 없지만, 공간은 제한적입니다. 부호님들은 한 분당 8개 객실을 사용하시고, 수행원 100명이 딸려 있으니, 여러분은 10인 1실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10인 1실이라니요? 80일을 어떻게 버텨요?”

사람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승무원은 차분히 대답했다.

“티켓 가격을 지불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기억해 주세요. 남은 공간이 여러분의 몫입니다.”


불만이 극에 달한 순간, 승무원이 제안을 던졌다.

“제가 제안을 하나 드리죠. 인원을 14명으로 줄이면 각자 한 방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떠신가요?”


사람들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서로 마이크를 넘기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북극의 오로라를 보는 게 평생의 꿈이에요. 하늘을 뒤덮은 빛의 향연을 꼭 보고 싶습니다.”

“저는 고래를 보고 싶어요. 그 울음소리가 얼마나 장엄할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요.”

“저는 작가예요. 북극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그 황량한 풍경이 제 영감을 채워줄 거예요.”

“저는 해군 출신입니다. 80일간 배에서 생활하는 건 저에게 일상이나 다름없죠.”

“저는 사업가입니다. 돈은 많지만 이 배는 추첨으로만 탈 수 있었어요. 제 방을 양보하시는 분께 지금 수표를 드리죠.”

“저는 아이큐 180이에요. 제가 북극에 가면 여러분보다 더 많은 걸 보고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에스키모예요. 북극의 추위는 제게 집과 같아요. 여러분은 춥겠지만, 저는 편히 숨 쉴 수 있어요.”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혹독한 기후와 군복무 18개월을 견뎠죠. 10인 1실? 군대에서 이미 해봤어요.”

“저는 시베리아 출신이에요. 툰드라에서 살죠. 배를 구경하고 북극에서 집 근처에 내려달라고 할 겁니다.”

“저는 눈을 본 적이 없어요. 북극에서 첫눈을 보고 싶습니다.”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운명은 늘 제 편이었죠. 이번에도 탈 거라 믿어요.”

“저는 학생이에요. 북극을 보면 제 인생이 바뀔 거예요. 탐험가의 꿈을 꿀지도 모르죠.”

“저는 이 학생의 형이에요. 아까 운이 좋다는 분이 계셨는데, 한 집에서 두 명이 모두 당첨될 정도까지는 아니시겠죠.”


승무원이 마이크를 잠시 가져갔다.

“아 잠깐, 지금 열네 분께서 말씀하셨죠?”

“아니, 제가 세어봤는데 13명이에요.”

말한 사람들 수를 손가락으로 세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그럼 지금 열세명이라고 알려주신 분까지 14명이네요. 이로써 14명은 결정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시간은 가고 있습니다. 144명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을 수는 없어요.“

안전요원들이 나머지 130명을 정리하며 선착장을 비웠다. 이제 14명만이 남았다.


승무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놀라운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저 뒤에 보이는 호텔에 묵으신 부호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고 흥미를 느끼셨습니다. 1만 4,400명 중 0.1%가 된 여러분을 위한 마지막 게임을 제안하셨어요. 단 한 명만 승선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또 줄이라고?”

“이 뭔 소리야?”


“중요한 건, 그 한 명에게 정식 티켓 값을 지불해 제대로 여행을 즐기게 하겠다는 겁니다. 어떠신가요?”

승무원의 말에 사람들의 눈이 반짝였다.


“마지막 게임은 투표로 하겠습니다.”

14명은 서로를 바라보며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곧 투표가 시작되었다.


결과는 이랬다.


학생의 형: 2표

사업가: 10표

아이큐 180: 1표

운이 좋은 남자: 1표


사업가가 승리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 9장씩 나눠주며 미소를 지었다.

“다들 고맙습니다. 북극에서 돌아오면 또 뵙죠.”


그가 배에 오르자, 선상에 있던 부호들이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한 부호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리치맨, 아주 재밌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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