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침에 눈을 떠 학교에 다녀온 뒤에도, 엄마가 집을 나간 줄 몰랐다. 평소 엄마는 아침 일찍 일을 나가 밤늦게야 들어왔기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빠 입에서 “엄마가 집을 나갔다"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사실 마음속 어딘가에선 언젠가는 엄마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놀랍지는 않았다.
엄마가 집을 나간 후 처음 며칠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부모님의 싸움이 사라지자 오히려 집이 조용해 조금 편하기도 했다. 그저 바쁜 엄마가 예전처럼 내가 눈뜨기 전 나가고, 내가 잠든 뒤 들어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가 잔뜩 남겨놓은 음식들을 다 먹어치우고, 인스턴트 카레와 참치캔,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이어지자 ‘엄마가 정말 우리를 두고 떠났구나’ 하는 현실이 가슴 깊이 밀려왔다. 그리고 종종, 이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아빠는 엄마를 찾기 위해 애썼다. 가끔 집으로 걸려오는 엄마의 짧은 안부 전화에 아빠는 경찰서에 찾아가 전화 위치를 알 수 없겠냐며 매달렸다. 원래는 범죄와 관련된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했지만, 경찰은 특별히 방법을 알려주었다. 새롭게 설치된 집 전화는 통화가 끝난 직후 버튼을 누르면 마지막 걸려온 번호로 다시 연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를 찾기는 어려웠다. 전화를 걸면 받지 않거나 연결되자마자 끊기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연락이 올까 말까 한 상황이라 시도조차 자주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엄마 없이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갔다. 처음엔 밥상 앞에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낯설고 허전했지만, 어느새 라면 하나 끓여 둘러앉는 식사가 당연해졌다. 빨래가 밀려도, 방이 어질러져도 누군가 치워줄 거란 기대를 하지 않게 됐다. 불편하고 어색했던 공백들이 점점 익숙한 일상이 되었고, ‘없는 것’에 익숙해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엄마가 떠난 이후, 집엔 나 혼자뿐이었다. 아빠는 새벽부터 밤까지 일했고, 동생은 태권도 선수 준비로 훈련과 학교를 병행하느라 늦게야 들어왔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온 집은 늘 어둡고 조용했다. 나는 문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TV를 켰다. 그 소리라도 없으면 적막 속에서 무서운 상상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침묵은 상상을 키웠고, 상상은 어느새 공포가 되어 나를 덮쳐왔다. TV 소리는 나를 현실에 붙잡아두는 유일한 장치였다.
혼자 있는 집이 싫어 점점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방과 후에는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학교 근처를 빙빙 돌거나, 문방구 앞에 앉아 오락기를 구경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은 느려졌고, 문 앞에 서면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열었다. 어두운 집 안으로 들어서는 그 순간이 하루 중 가장 싫었다. 그래서 더 늦게, 더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친화력이 좋았던 나는 원래 반 아이들과 두루 잘 지냈지만, 정작 학교 안에는 특별히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다. 누구와도 쉽게 말문을 트고, 처음 보는 아이에게도 낯가림 없이 먼저 다가가 말을 걸 수 있었다. 장난도 잘 쳤고, 유쾌한 말투와 리액션 덕분에 웃음을 끌어내는 데 능했다. 그래서 누구와도 편하게 지내긴 했지만, 오히려 특정 무리에 속하지 못한 채 늘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대신 학교가 끝나면 늘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그러다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가까운 친구 무리가 생겼다.
대여섯 명의 친구들 중 이른바 일진이라 불리는 애들도 몇 명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학교가 끝나면 빈집인 친구네 집으로가 맥주 몇 병과 과자를 놓고 수다를 떨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술맛도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냥 사춘기의 허세였던 것 같다. 다들 진심으로 취하고 싶어서라기보단, 어른 흉내를 내고 싶었을 뿐이다. 가끔 깊은 대화가 오갈 때면 친구들이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우리 집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 무리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과의 약속이 없을 때는 난 아무도 없는 집에서 TV를 벗 삼아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릴 때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마음이 평화로웠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틈틈이 그림을 그렸고, 내 그림을 본 친구들은 자기 얼굴을 그려달라며 종이를 건넸다. 그 덕에 반 아이들의 캐리커처를 맡아 학교 교지에 실릴 수 있었다. 친구들의 얼굴 특징을 살려 캐릭터처럼 표현하는 작업은 내게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엄마는 몇 년째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어느덧 중학교 3학년이 되었고,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인문계와 실업계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내신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대학 진학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아빠의 수입은 넉넉하지 않았고, 버는 족족 생활비로 빠져나갔다. 특히 동생이 태권도 선수를 준비하면서 들어가는 시합 참가비, 전지훈련비 같은 비용이 부담이 컸다. 아빠는 동생의 꿈만큼은 포기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우리 집 형편은 더 팍팍해져 갔다.
선택지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중, 학교 교지에 실린 내 그림을 눈여겨본 학년부장 선생님이 상업고등학교 하나를 추천해 주셨다. 당시 그 학교는 지역에서 가장 좋은 상업고였고, 유일하게 시각디자인과가 있었다. 담임도 아닌 선생님이 내게 그렇게 관심을 가져준 것이 의외였고, 한편으론 참 고마웠다. 혹시 우리 집 사정을 알고 계셨던 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지금도 그분은 내 인생에서 손꼽히는 고마운 어른이다.
그렇게 나는 대학을 포기했지만, 고등학교의 학과만큼은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아빠는 내 결정을 조용히 받아들여주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나는 마음이 설렜다. 뭔가 잘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시각디자인과 수업은 너무나 재미있었다. 매일이 즐거웠고, 오랜만에 꿈을 꾸기 시작했다.
아빠는 고혈압과 당뇨를 앓고 있었지만 하루 종일 일하느라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했고,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그런데 병원 치료 대신 지인의 말에 넘어가 효과도 없는 비싼 의료기기를 사고, 그것에만 의지했다. 결국 치료 시기를 놓치며 시력을 잃게 되었고, 아빠가 더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그 소식을 들은 엄마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