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다시 만난 엄마는,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도 살갑거나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돌아온 엄마는 매일 술에 취해 있었고, 입에 댄 적도 없던 담배를 아무렇지 않게 피워댔다. 말투는 거칠고, 표정은 날카로웠으며, 가족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정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어쩔 수 없이 잠시 머무는 타인처럼 보였다. 그래도 나 몰라라 하지 않고 아빠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집으로 다시 돌아와 준 엄마가 고맙게 느껴졌다.
엄마는 돌아오자마자 작은 식당을 열었다. 사실 식당이라기보다는 포장마차에 가까웠다. 건물 외벽 자투리 공간에 천막을 치고, 그 안에 조리 공간을 만들었다. 보글보글 떡볶이와 어묵 끓는 냄새가 길가로 퍼졌고, 조리대 앞 나무판 밑에는 손님들이 앉을 수 있도록 붉은 플라스틱 의자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엄마는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열고 재료 손질을 시작했다. 장사가 예전처럼 잘 되진 않았지만 손님이 없는 시간에도 식재료를 옮기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천막의 먼지를 털며 쉼 없이 움직였다. 그렇게 엄마는 하루하루를 버텼고, 그 벌이로 우리 가족은 겨우 먹고살 수 있었다.
작은 식당 수익은 생활비 만으로도 빠듯했다. 하지만 아직 갚아야 할 빚이 조금 남아있었는데 다행히도 동네 사람들은 더 이상 우리 집 문을 두드리며 빚독촉을 하지는 않았다. 엄마가 몇 년 동안 가출했다 이제야 집에 돌아왔다는 이야기와 아빠의 실명 소식을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이었기에, 더는 몰아붙이지 않고 조용히 눈감아준 듯했다.
하지만 빚에 대한 압박이 사라졌다고 삶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아빠는 시력을 잃은 후 방 안에 누워만 지냈고, 건강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엄마는 어느 날부터 매일 가게 손님들과 술을 마시고 만취해 집에 돌아왔다. 비틀비틀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내가 이 고생을 왜 해야 되는데!”라며 울부짖었다. 그러고는 아픈 아빠를 몰아세우고, 나와 동생에게 분풀이를 했다.
나와 동생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도 엄마의 고함 소리에 깨어나 새벽까지 신세 한탄과 하소연을 들었다. 졸린 눈을 간신히 뜨고는 말대꾸라고 혼이 날까 싶어 숨죽이며 듣고만 있다가, 엄마가 쓰러져 잠들고 나면 겨우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잠을 청했다. 엄마가 혼자 가족을 책임지느라 힘든 건 알지만, 반복되는 짜증과 원망은 견디기 버거웠다. 술주정은 점점 심해졌고, 집은 차츰 지옥을 닮아갔다. 이런 감정을 나 혼자만 느낀 게 아니었는지, 동생은 나보다 먼저 집에서 도망쳤다.
태권도 선수였던 동생은 체육특기생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선배와 시비 끝에 싸움이 났고 징계를 받으며 운동을 그만두게 되었다. 체육특기생이었던 터라 학교에 더 다닐 수 없게 되었고,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지만 받아주는 곳은 좀처럼 없었다. 결국 문제아들이 몰리는 학교에 어렵게 전학했지만, 비싼 돈 들여 맞춘 새 교복을 한 달도 채 입지 못하고 집을 나가버렸다. 없는 살림에 운동하는 자식을 위해 뒷바라지하며 품었던 부모님의 기대는 그렇게 무너졌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접한 시각디자인 수업은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로웠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컴퓨터 앞에 앉아 늦은 밤까지 그래픽 프로그램을 만지작거렸다.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프로그램으로 내 상상을 눈앞에 그려낼 수 있었고 그 그림을 인터넷 세상 속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즐거웠다. 공모전 준비로 만든 캐릭터가 출력돼 판넬에 붙여졌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설레기도 했다. 그렇게 하나둘, 내 손으로 완성한 그림과 캐릭터들이 쌓여갈수록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커졌고, 캐릭터 디자이너라는 구체적인 꿈도 생겨났다.
갑작스러운 동생의 가출은 충격이었고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동시에 내 마음 한편엔 작은 기대도 생겨났다. 이제 더는 동생 뒷바라지에 돈이 들지 않으니, 혹시 내가 대학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원하는 직업을 찾을 때까지 조금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까? 머릿속에 자꾸 그런 희망이 피어올랐다.
동생이 태권도를 시작한 이후, 부모님은 내 꿈에 대해 단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나에 대한 관심과 지원도 사라졌다. 솔직히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한 번도 “무엇이 하고 싶다”거나 “도와 달라”라고 말해본 적 없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내 꿈을 처음으로 말한다면 이번만큼은 들어줄 거라 믿었다. 금전적인 도움까진 바라지 않았다. 그저 내가 선택한 길을 지지해 주고, 한마디 응원이라도 건네주길 바랐다.
오랜 고민 끝에 용기를 낸 날, 나는 학교를 마치고 곧장 엄마의 가게로 향했다. 한참을 우물쭈물 서 있다가 마지막 손님이 나간 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엄마, 나 캐릭터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대학은 현실적으로 어렵겠지만… 다니고 싶은 학원이 있는데, 혹시 보내줄 수 있을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하아... 지금 우리 집이 그런 한가한 소리 할 형편이야?” 단호하고 차가운 말 한마디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한참을 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 오라며 다그쳤다. 그리고 현장실습이 가능한 시기가 되자마자, 가출한 동생의 운동 코치 소개로 나를 곧장 지압 안마원에 취직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