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압 안마원으로 출근하라는 엄마의 말에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아파 집에 누워 계신 아빠, 갑자기 집을 떠나버린 동생, 그리고 혼자 힘겹게 일하며 생활비를 감당하는 엄마를 보면, 어디든 빨리 취직해 돈을 버는 게 맞는 일처럼 느껴졌다.
첫 출근 날, 무거운 발걸음으로 오른 버스 안에는 교복을 입은 또래 학생들이 가득했다. 책가방을 메고 친구와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도 저들 틈에 있었는데...'라는 생각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차피 학교를 더 다녔다 해도 기껏해야 6개월 남짓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이 괜히 아쉬웠다.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는 걸까. 평소엔 촌스럽다고 입기 싫었던 교복이 자꾸 그리웠다.
안마 지압원의 일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간호사처럼 생긴 유니폼을 입고 손님을 안내하고 결제를 도왔다. 시각장애인 원장님과 안마사분들을 도우며 청소와 정리도 맡았다. 첫 급여는 80만 원이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20만 원을 더 얹어줘 100만 원이 됐다.
첫 월급을 받고 부모님께 어떤 선물을 드릴까 고민하다가, 인터넷에서 빨간 내복이 좋다는 글을 많이 봤다. 하지만 그보다는 필요한 데 쓰시도록 현금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가는 길, 편의점에 들러 새하얀 종이봉투를 사고 월급의 절반을 담았다. 엄마가 오랜만에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실 거라 기대하며 마음이 괜히 뿌듯했다. 그러나 이런 내 예상과 달리, 엄마는 불같이 화를 냈다. "이게 전부야? 왜 이것밖에 안 줘?" 엄마의 고함에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내 앞으로 봉투가 내팽개쳐졌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엄마에게 반항했다. 그동안 먹고 싶은 것도 참고, 하고 싶은 것도 포기하며 살았으니 내가 번 돈의 일부는 나를 위해 쓰고 싶었다. 엄마는 나에게 이기적이라고 말하며, 자식 된 도리를 해야 하지 않냐고 고함을 질렀지만, 나는 소리쳤다. "더는 못 줘! 싫으면 그 돈도 받지 마!" 그러고는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문을 잠갔다. 문 너머로 엄마의 격앙된 목소리와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한참 들려왔지만, 나는 무시했다. 그날 이후로는 다행히 아무 말 없이 월급의 절반만 받아 가셨다.
출근하면 곧장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안내 데스크에 앉았다. 일은 편했고, 대기 시간이 많아 여유로웠다. 간혹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손님 대기실에 켜진 TV를 멍하니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럴 때면 머릿속에 자꾸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고등학교 졸업까지만이라도 조금만 시간을 더 줬다면, 더 나은 곳에 취직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자꾸 들었다. 엄마가 원망스러웠고,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시간이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그냥 TV를 멍하니 보고 엄마를 원망하는 것 말고, ‘이 시간을 다르게 쓸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됐다. 그날 나는 퇴근길에 평소 그냥 지나쳤던 동네 책방에 들어갔다. 처음엔 중학생 때처럼 만화책이나 빌릴 생각이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상가 지하 1층에 위치한 그 책방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대부분의 책 대여점이 사라진 시기였기에 이런 공간이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만화책은 물론이고, 한쪽 벽엔 소설, 에세이, 자기 계발서, 시집 등 다양한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사실 나는 학창 시절 내내 만화책만 읽었고, 활자만 있는 책은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빌리자마자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그 후로 나는 만화책 대신 글자가 가득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아침형 인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같은 자기 계발서까지. 눈에 띄는 책이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책방에 들른 날엔 아직 한 장도 펼쳐보지 않은 책 한 권이 가방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괜히 설레고 기분이 들떴다. 버스 안에서, 침대에 눕기 전, 쉬는 시간마다 책을 꺼내 읽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멋지게 느껴졌다. 언젠가는 이 책방 안의 책들을 전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끝내 그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어림잡아 백 권쯤은 읽은 것 같다.
그 책방에는 유독 자기 계발서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그런 책을 많이 읽게 됐다. 그리고 그 책 속 문장들을 통해 나는 점점 더 많은 걸 깨달아갔다. 책을 읽을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과는 다른 나, 성장한 나를 상상하게 됐다. 이루지 못한 꿈을 다시 꿔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더 깊이 책에 빠져들었다.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기도 하고, 인상 깊은 문장은 노트에 정성껏 옮겨 적었다. 책들이 말하는 ‘삶을 바꾸는 방법’의 핵심은 대체로 이랬다.
“무언가를 바란다면, 그 목표를 구체적으로 세워라. 그리고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하나씩 시작하라.”
나는 그 말 그대로 연습장을 펼쳐 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을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하나씩 조사해 하루, 한 달, 일 년 단위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실천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꿈을 이루기 위해선 지금의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엄마께 드리던 월급의 절반도 줄 수 없게 되고, 한동안 잠잠했던 엄마의 분노가 다시 터질 게 뻔했다.
매일 밤 '이번 달까지만 일하고 그만두는 거야!'라고 수없이 다짐하며 잠들었지만 아침이 되면 '조금만 더, 아직은 때가 아니야...'라며 출발점 앞에서 계속 머뭇거렸다. 마음은 늘 앞섰지만, 현실에 발목이 붙잡힌 나는 실행하지 못할 계획들만 끝없이 써 내려갔다. 그렇게 시간은 1년, 2년 빠르게 흘러갔다. 용기를 냈다가도 다시 주저하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갑자기 현실이 들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