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팔자의 비밀

by 앙또아


엄마는 살아 계실 때, 술 한 방울도 못 마시는 내 남편을 볼 때마다 종종 이렇게 말했다. “어휴, 샌님 같아서야. 남자는 술도 좀 하고 그래야지.”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며 짓궂게 말했지만, 나는 알았다. 엄마는 속으로 남편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다는 걸.


남편은 큰 굴곡 없이, 조용하고 단단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감정의 기복도 크지 않고, 늘 잔잔하고 온화하다. 나는 그의 곁에서 처음으로 ‘평온’이라는 삶을 경험했다. 나도 모르게 언성이 낮아졌고, 불안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마치 잔잔한 호숫가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내 안의 거센 파도도 어느새 멈춰 있었다.


남편이 나를 바꿔 놓은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 곁에서 나는 지금도 천천히 잔잔해지고 있는 중이다.


연애를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어느덧 십 년을 훌쩍 넘겼다. 그동안 우리는 단 한 번도 격하게 싸운 적이 없다. 내가 가끔 입을 삐죽이며 툴툴거리면, 남편은 조용히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랬구나. 미안해.” 그는 목소리를 높인 적도, 감정이 격해질 틈을 준 적도 없었다.


물론 우리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딸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의 일이 갑자기 바빠졌다. 육아가 가장 낯설고 힘들던 시기, 나는 하루 종일 갓난아기와 씨름하며 지쳐 있었고, 남편은 밤 11시가 다 돼서야 퇴근하곤 했다. 어떤 날은 주말에도 출근해야 했다. 아이가 잠든 뒤에야 겨우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고요하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엇갈리지 않았다. 지친 얼굴로 마주 앉아도, 서로에게 건네는 말은 언제나 따뜻했다. “오늘 하루 진짜 고생했지. 아기 혼자 보느라 힘들었겠다.” “이 시간까지 일했어? 괜찮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짧은 말 한마디에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피로마저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고단한 하루의 끝에서 서로의 손등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버텨냈다.


결혼이란 결국, ‘서로를 아끼는 마음’ 하나로 이어지는 긴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젊은 세대는 손해 보는 걸 유난히 꺼린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래서 결혼에서도 생활비, 집안일, 감정 노동까지 정확히 반으로 나누려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결혼이란 정확히 반으로 나뉘는 일이 아니라는걸. 함께 살아가다 보면 어느 한쪽이 더 기울어야 할 때가 있다. 그래야 비로소 균형이 맞춰지기도 한다.


희생은 결혼에서 빠질 수 없는 단어다. 삶이 언제나 맑기만 할 수는 없다. 비가 쏟아질 땐 내가 먼저 우산을 펴야 할 때도 있고, 또 어떤 날엔 남편이 그 우산을 내게 씌워줘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우리는 놀랄 만큼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 집이나 차 같은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욕심내기보단,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가’를 먼저 따지는 성향이 같았다.


아이의 교육 방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억지로 공부를 시키기보다, 아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걸 찾아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느긋함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 또한 우리 둘이 참 닮아 있었다.


노후에 대한 상상도 비슷했다. 사람이 너무 붐비지 않는, 자연과 어우러진 도시에서 반려동물과 함께 조용히 살아가는 삶. 일을 완전히 놓기보다는, 작고 소소한 일이라도 즐겁게 오래오래 해나가고 싶다는 바람까지도 꼭 닮아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우리는 함께 살아오며 크게 다툰 적이 없다. 서로의 방향이 비슷했기에, 굳이 설득하거나 고집부릴 일도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남편은, 내가 가장 힘들어했던 것들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엄마로 인해 나는 술에 대한 거부감이 컸고, 자주 마시거나 과하게 마시는 사람을 극도로 꺼렸다. 그런데 남편은 체질적으로 술을 거의 마시지 못했다.


이토록 나와 꼭 맞는 사람을 만나게 된 건, 그동안 수많은 고비를 견뎌낸 나에게 하늘이 내려준 작은 보상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어릴 적,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늘 고요했다. 현관문을 열면 불 꺼진 집 안에 인기척 하나 없었다. 아빠와 엄마는 모두 일터에 나가 계셨고, 집 안에는 TV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가방을 벗어던진 뒤, 냉장고 문을 열어 혼자 간식을 꺼내 먹으며 괜히 큰 소리로 말을 해보기도 하고, 라디오를 틀어보기도 했다. 그 정적이 너무나 싫었다. 마치 텅 빈 공간에 나만 덩그러니 놓인 것 같았다.


그래서 다짐했다. 내 아이만큼은 따뜻한 누군가가 기다리는 집에서 자라게 하겠다고. “다녀왔어요!”라는 인사에 “왔어? 얼른 손 씻고 와, 간식 차려줄게.” 따뜻하게 반겨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 다짐은 내가 전업주부가 되기로 한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세상은 점점 더 팍팍해졌다. 물가는 오르고, 집값은 끝없이 뛰었다. 외벌이만으로는 버티기 힘든 순간들이 찾아왔고, 가족을 책임지려 애쓰는 남편의 어깨는 점점 무거워 보였다.


그래서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뒤로는 집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을 하나씩 시작해 보았다. 작은 수입이라도 보태고 싶었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내 첫 번째 도전은 웹툰이었다. 당시엔 일상툰이 유행하던 시기였는데, 나는 그 틈에서 차별화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세대들이 옛 시절을 떠올리며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담았다. 이름하여 ‘추억팔이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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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진 플랫폼 '코믹 스퀘어'에서 정식 연재를 했었다.


네이버 ‘도전만화’에 연재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스트도전’에도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새로 문을 연 플랫폼에서 정식 연재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연재를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플랫폼이 문을 닫으면서 웹툰 작가로서의 여정도 허무하게 끝이 났다.


처음엔 아쉬움이 컸다. ‘웹툰 작가’라는 타이틀이 그렇게 쉽게 사라져버린 것이 섭섭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매주 마감을 지켜야 하는 삶은 나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손이 느린 편이다. 일주일마다 새 콘티를 짜고, 스케치를 하고, 채색까지 하다 보면 밥 먹을 시간조차 부족했다. 세이브 원고가 사라진 뒤에도 독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꾸역꾸역 버텼겠지만, 그랬다면 아마 삶은 점점 피폐해졌을 것이다.


두 번째 도전은 유튜브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에 관한 영상을 올렸고, 한때는 구독자 수가 3만 명을 넘기도 했다. 광고 수익이 많았던 달도 있었고, 브랜드 협찬이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수익이 줄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열정도 서서히 식어갔다.


n29.jpg 현재는 채널명을 '앙또아, 난생처음'이라고 바꾸고 일상 에피소드를 쇼츠로 만든 썰툰 영상을 업로드해 놓았다.


그러던 중,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코로나19가 터졌다.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아이를 돌보느라 영상 제작은커녕 숨 돌릴 틈도 없었다. 아이는 낯선 온라인 수업에 힘들어했고, 나는 그 곁을 지키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길고도 지루한 시간이 흘렀고, 어느새 3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 뒤로도 집에서 할 수 있는 여러 부업을 시도해 봤다. 쇼핑몰 리뷰 작성, SNS 댓글 알바, 교육 관련 앱을 관리하거나 홍보 영상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오래 이어가긴 어려웠다. 시간이 부족하거나, 내 성향과 잘 맞지 않거나, 알고 보니 사기성 짙은 일이라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무언가를 시도할 때마다 자꾸만 벽에 부딪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에세이를 접하게 되었다. 처음엔 책을 읽었다. 유명한 작가들의 글을 읽으며 마음을 다독이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작가의 문장을 따라 읽다 보면, 자꾸만 내 머릿속에 내가 쓰고 싶은 문장이 떠올랐다. 마치 오래 묵혀 있던 말들이 글로 나오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내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나도 써보고 싶다.’ 그 욕망은 생각보다 강렬했다. 하지만 막상 쓰려니 겁이 났다. 예전에 웹툰을 그릴 때도 그랬다. 닉네임 뒤에 붙은 ‘작가’라는 단어가 괜히 무겁게 느껴졌다. 작가는 뭔가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 대단한 창작물을 내놓아야 할 것 같았고, 나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결국,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브런치스토리에 글 한 편을 써 저장했고, 작가 신청을 눌렀다. 그리고 며칠 뒤, 작가 승인이 났다. 놀랍게도.


그렇게 나는 다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아이를 낳고 지난 10년 넘는 시간 동안 참 많은 시도를 했다. 웹툰, 유튜브, 각종 부업까지... 뭔가를 시작할 땐 늘 설렘과 의지가 있었지만 눈에 띄는 성과를 낸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 내가 이제 또, ‘돈도 안 되는 글’을 쓴다고 하니 누군가는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선 뭐가 되겠냐"라고 말이다. 하지만 남편은 단 한 번도 그런 말, 그런 표정을 한 적이 없다. 내가 무언가를 시작한다고 하면 “이번엔 어떤 거야?” 하며 호기심 섞인 눈빛으로 물었고, 늦은 밤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으면 “집안일 만으로도 힘들 텐데... 쉬엄쉬엄해.” 하며 내 어깨를 주물러 줬다.


내가 낸 결과보다 ‘지금 무언가를 향해 몰두하는 나’의 모습을 더 응원해 주는 사람. 그게 남편이었다.


박복한 팔자라고만 믿었던 내 인생은 알고 보니 너무나 귀한 팔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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