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않는 딸

by 앙또아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낳고 키울수록 오히려 엄마가 점점 더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딸이 혹시라도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 늘 단어 하나, 말투 하나까지 조심한다. 그 아이가 어떤 감정을 느낄지 상상하며, 최대한 부드럽고 따뜻한 말로 다가가려 애쓴다. 하지만 엄마는 내게 그런 배려를 단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


기분이 상하면 바로 말부터 쏟아냈고, 불만이 있으면 주저 없이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엄마는 자신의 외로움에만 몰두했고, 나의 감정은 늘 뒷전이었다. 결국, 그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엄마는 나를 종종 ‘차가운 년, 냉정한 년’이라 불렀다.


엄마는 자식에게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딸인 내가, 남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혼자 사는 여자는 어디서든 무시당하지 않아야 해.”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늘 장지갑에 현금을 두둑이 챙겨 다녔다. 당당해 보이고 싶다는 그 말처럼, 밖에서는 누구보다 씩씩하고 자신감 있어 보였다.


동네 지인들이 돈을 빌려달라 부탁할 때면 호탕하게 웃으며 몇백만 원씩 선뜻 빌려주던 엄마. 하지만 정작, 내가 오랜 고민 끝에 어렵게 꺼낸 부탁에는 “나도 힘들어. 돈 없어.”라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럴 때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내가 엄마를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어떻게 어린 자식을 두고 집을 나갈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엄마는 집을 나간 3년 동안 한 번도 나와 동생을 보러 오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간간이 걸려오는 안부 전화가 전부였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쉬워진다는 말은 아마 이런 상황에도 적용되는 걸까. 엄마는 나와 동생 외에도 딸이 둘 더 있었다.


나에겐 아버지는 다르지만 어머니는 같은 언니들이 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부 자매들.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내가 성인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엄마에게도 과거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시집가 가정폭력을 겪었고, 두 딸을 남겨두고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고 했다.


호기심이 일었던 나는, 당시 유행하던 싸이월드에서 이부 자매를 찾아냈다. 사진 속의 언니는 나와 다르게 키가 크고 늘씬한 미인이었다. 방명록에 글이라도 남겨볼까 망설였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그렇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다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엄마는 집으로 돌아온 이후,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내가 고시텔에서 살 때도, 남편을 만나 아이를 낳고 살아갈 때도, 술은 늘 엄마의 곁에 있었다.


아프신 아버지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가끔, 뜬금없이 엄마에게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기도 했다. 한 번은 매일같이 술과 담배에 지친 엄마가 걱정되어 건강검진을 예약했다. 병원까지 함께 가서 대기하는 동안, 엄마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차례가 되자 갑자기 병원을 나가버렸다. 결과가 나쁘게 나올까 두렵다며 검사를 거부했다. 엄마는 결국, 생전에 한 번도 제대로 된 검진을 받지 않았다.


어느 날, 통화 중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가 어딘가 이상했다. 힘이 빠져 있었고, 말끝이 흐려졌다.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기에,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엄마 집으로 달려갔다.


현관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고,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런데 현관 너머로 전화 벨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전화를 받지는 않았지만, 휴대폰이 안에 있다는 건 분명했다. 불길한 마음이 들어 나는 집 옆 골목으로 돌아가, 부엌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1층이라 창문이 열려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엄마가 대자로 누워 있었다. 아파서 쓰러진 건 아닌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커다란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그러자 엄마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별일 아니야, 그냥 가...”라고 중얼 듯 말했다.


식탁 위에는 텅 빈 술병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거실은 정돈되지 않은 채 어수선했다. 문 좀 열어달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버렸고 손을 휘휘 저으며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창밖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발길을 돌렸다.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엄마가 연락되지 않아 찾아가 보면, 혼자 술에 취해 쓰러져 자고 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이번도 그와 같을 거라, 애써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틀 뒤,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엄마는 내가 다녀간 이후에도 계속 술을 마셨던 것 같다. 며칠째 연락이 닿지 않자 걱정이 된 지인이 집을 찾았고, 냉장고 앞에 쓰러진 엄마를 발견했다. 이미 의식은 없었고, 숨도 쉬고 있지 않았다.


곧바로 경찰에 신고됐고, 나는 경찰관의 전화를 받고 믿기지 않는 마음으로 다시 엄마의 집으로 향했다. 며칠 전 내가 봤던 풍경보다 상황은 더 심각했다. 식탁이며 바닥 위, 싱크대 주변까지 빈 술병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방 안은 텅 빈 듯 고요했다.


부검 소견서에는 “전반적인 장기 손상과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심장 기능 저하”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결국 긴 시간, 스스로를 천천히 무너뜨려온 술이 엄마의 몸을 견디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아버지의 장례식과는 달리, 엄마의 장례식장 안은 조용했고, 조문객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엄마는 삼십 년 넘게 같은 동네에서 살았고, 가까이 지낸 이웃도, 술자리를 자주 함께한 지인들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막상 엄마의 마지막 길을 지키러 온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한때 술잔을 부딪치며 함께 웃던 얼굴들은 절반도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선뜻 밥을 사고, 필요하다면 돈도 내어주던 사람이었지만, 정작 마지막 순간 곁에 남은 건 도움을 요청했다 거절당했던 나와 동생, 우리 둘뿐이었다.


외가 쪽을 통해 이부 자매들에게도 소식을 전했지만, 끝내 장례식장에 오지 않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마음을 닫고 살았다고 했다. 엄마가 한 번도 자신들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속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인생에서 단 한 번, 정말 힘들었던 시절. 엄마에게 연락해 돈을 조금만 빌려달라 부탁했지만, 엄마는 욕설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그 후로, 그들은 ‘엄마’라는 존재를 지운 채 살아왔다고 했다.


나는 장례식 내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엄마의 굴곡진 인생과 그 쓸쓸한 끝이 안타깝게 느껴지긴 했지만, 가슴이 저리지는 않았다. ‘왜 나는 엄마의 죽음이 슬프지 않을까.’ 여러 번 스스로에게 물었고, 결국 그 답을 찾았다.


사람들이 우는 건, 결국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퍼서다. 그리운 사람의 빈자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흐르는 눈물이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엄마는, 늘 곁에 없었다. 어린 시절에도, 어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동안에도, 엄마는 늘 내 곁에 없었다.


이 말을 들으면 엄마는 하늘에서 억울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엄마 없이 살아가는 지금의 삶이, 전혀 낯설지 않다. 혹시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아직 시간이 덜 지나서 실감이 안 나는 거 아닐까?”


하지만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7년. 나는 안다.


시간이 더 흐른다 해도, 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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