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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Nov 01. 2024

그토록 기다렸던 이야기,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의 작은 땅의 야수들을 읽고

1. 도입: 톨스토이적인 소설

  최근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을 시작으로 역사와 인간의 삶이 많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 느껴지던 와중, 마침 톨스토이 상을 수상 받은 작은 땅의 야수들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톨스토이적인 책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내린 결론은 ‘인간과 세계의 섬세한 상호작용’이었다. 대다수의 현대 소설이 자아와 세계의 갈등을 담고 있고, 톨스토이는 그것을 넘어 각 인물의 시각을 바탕으로 저마다의 세계와 복잡하고도, 우연적이고 때론 운명적인 관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소설은 각자의 입장에 따른 섬세한 묘사가 자주 등장하며, 주요 등장인물의 정서와 심리에 몰입하고, 그들의 깊이에 빠져들 수 있다. 그리고 이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구한말부터 산업화시대에 이르기까지 70여 년의 시간을 등장인물과 함께하는 여정은 600쪽이라는 분량이 주는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흥미진진함과 몰입감이 느껴졌다. 국권피탈, 3.1 운동, 독립운동, 억압적 정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가 겪어온 지난 20세기는 간절함의 피와 눈물의 연속이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옥희, 연화, 월향, 은실, 단이, 야마다, 이토, 하야시, 정호, 영구, 미꾸라지, 명보, 성수, 한철 등의 주요 인물은 각자만의 성격과 삶의 경로가 고운 비단처럼 섬세하게 짜여 있어서 하나의 작품 속에서 10여 명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면서도 한국인에 대한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야마다, 힘이 전부였던 정호가 점차 대의를 위해 바뀌어가는 과정, 누구나 한 번쯤을 느꼈을 깊은 우정과 벽을 보여주는 옥희와 연화 등 오늘날의 우리 사회의 인간상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인물들에게 나는 너무나 매료되었다.


2. 감상: 잊고 있던, 어쩌면 우리가 파괴하고 있었던 그것에 대하여..

  이 작품을 한 단어,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삶을 한 단어로 뭉그려버리는 것임을 알기에 이번 글은 그저 내가 읽은 과정과 날 것의 느낌을 적어보려고 한다.

  현대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로, 시점과 시각이다. 시점은 그것에 대해 말하는 이가 기준이며, 시각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가 기준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것이 가장 중요해졌을까. 나는 이에 대해 작가들이 인간의 필연적 한계를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계는 개인이 타인이 될 수 없음에서 비롯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상에서 타인을 이해한 것처럼 느끼지만, 그것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공감을 하거나,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것이다. 인간의 시각은 전지전능하지 않기에 상대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들을 고려할 수 없다. 그렇기에 자신의 해석에 따라 그들을, 사건을, 세계를 판단하곤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영영 주관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작가들은 이 점을 알기에 시각을 바꾸어가며 이야기를 묘사한다. 누군가에겐 구원자가 누군가에게는 악마가 될 수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작가들에겐, 더 이상 완벽한 선인도 완벽한 악인도 없다. 복잡한 인간 내면의 다차원성, 줄여 말하면 모순. 이것이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나 지독한 이분법 속에 놓여있다. 제3의 지대가 존재함을 알지만, 우리는 그 지대를 쉽게 잊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오래전부터 이어지던 것이다. 이 소설도 바로 그 지점을 우리에게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악인 같은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도움을 주는 모습, 가장 하찮게 여기는 기생이 민족을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하는 모습,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극단화된 이념을 프레임으로 사용하는 모습 등은 선입견, 속단, 편견이 가득한 오늘날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이자, 성찰과 반성의 계기를 제시한다.

  왜 우리는 타인을 정의하려고 하는가. 타인을 해석하려고 하는가. 타인은 물건이 아니라 나와 동등한 인격체이다. 그들은 돋보기로 바라봐야 할 존재가 아니라 함께 내일을 바라보아야 할 존재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삶은 끝없는 미지의 영역을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기에 더더욱 나의 세계가 세계의 전부가 아닌 일부분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내가 보지 못한 세계가 있음을, 그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선택에 대해 나의 잣대로만 바라보지 않아야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러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가 떠오르는 인력거 바퀴의 무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나오는 강물에 대한 깨달음이 떠오르는

나는 마침내 바다와 하나였다.

이었다. 역사적 흐름 속에서 작가가 작품의 마지막에 철학적 비유를 은연중에 던졌다는 것은 서문에서 그가 말했듯,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에 대한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타인을 자신을 기준으로 해석했던 과거의 옥희는 정호의 진심을 작품의 끝에 이르러서야 깨닫는다. 그런 옥희에게 바다는 곧 정호를, 사랑을, 그리고 세계를 의미한다. 바다를 내 손으로 잡으려 하면, 손에서 흘러내려 모두 놓쳐버리고 만다. 그러나 바다와 하나가 되어 흘러간다면, 바다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헤세의 싯다르타에 나오는 부처의 미소에 담긴 깊은 의미이자, 카뮈가 부조리에서 벗어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이자, 지난 세월동안 수많은 철학가와 심리학자들이 놓치고 있던 것이다.

  삶에 대해 우리는 여타의 사람들이 그랬듯 끝내 정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정답은 우리와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거지의 삶 속에서도, 미디어 영상의 타인에게서도, 심지어는 바람에 흔들거리는 꽃잎 속에도 우리가 찾지 못한 것들이 숨 쉬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찾기 위해 그들을 돋보기 속에 가둔다면, 그들을 둘러싼 세계의 맥락과, 그들의 깊은 내면을 결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양자역학에서의 관측이라는 행위가 중첩 상태였던 대상을 하나의 상태로 결정해버리는 것처럼 인간의 중첩된 모순을 보지 못한 채 단편성으로 대상을 파괴할 뿐이다. 바다를 느끼기 위해서는 바다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 뛰어들어 차가움을, 짠맛을, 어두운 깊이를 경험해야 하는 것처럼, 해답은 그저 그들과 함께 살아가다가 문득 느끼는 것은 아닐까 싶다.

  언젠간 나왔으면 하는 그러한 이야기를 담은 ‘작은 땅의 야수들’. 이 작품 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으며, 지금도 답을 찾아가는 중인 것들이 무수함에도 이 작품의 줄거리에 대한 나의 해석을 제시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감상을 제시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너무나도 소중한 이야기이자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던 이야기였기에 나의 해석이 다른 이들이 이 소설을 맞이하는 선입견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각자만의 삶의 기둥을 주체적이면서도, 세계를 직접 느끼면서 세웠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번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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