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릴 때는 휴대폰이 없었어요. 아빠가 언제 퇴근하실지 몰라서 엄마와 언니와 식탁에 둘러앉아 아빠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아빠를 기다리며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오늘 하루 친구들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엄마에게 시시콜콜 얘기하고 있었겠죠? 그러다 아빠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현관으로 달려 나가 아빠를 맞이하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맛있는 저녁을 먹었습니다. 저에겐 이 시간이 너무 행복했어요. 아빠 손에 치킨까지 들려있으면 행복은 2배였죠.
누군가 저에게 왜 아이를 갖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전 이 기억 때문이라고 대답할 거예요. 제가 엄마가 되어서 똑같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전 늘 상상했죠. 결혼을 하고 나의 가정을 이루면 당연히 아이들을 낳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요.
하지만 한 생명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어요.
전 평소 길을 나설 때면 어떻게든 빠르게 가려고 내비게이션을 켜고 추천길이 좋을지, 고속도로가 좋을지 고민을 하며 길을 나섭니다. 하지만 난임부부가 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은 내비게이션도 없고 정말 험난하더라고요. 지름길은커녕 가는 길마다 우회도로와 수많은 방지턱이 있고, 심지어 어떤 길은 막다른 길이기도 하죠.
답답함에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면 주위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해요. 나만 멈추어 있고 다른 사람들은 마치 슈퍼카를 타고 뻥 뚫린 고속도로를 시속 150km로 지나가는 것 같이 보이거든요. 정신 차리고 보니 지금 제가 가야 할 길보다 다른 사람이 가는 모습만 구경하고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점점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임신이 내 마음대로, 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뿐인데 임신 이외에 회사 생활부터 일상까지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작은 것 하나에도 짜증이 나고, 불평불만을 하게 되었죠. 점점 제 마음의 그릇이 좁아지는 걸 느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되돌아보니 저를 이렇게 만든 건 난임이 아니었어요. 바로 제 생각이 저를 이렇게 만든 거였죠. 나만 임신이 안된다는 생각, 나만 계속 실패한다는 생각이 저를 갉아먹고 있었어요. 이유를 찾게 되니 해결 방법도 보였습니다. 내가 생각을 조금만 다르게 하고, 마음을 조금만 올바르게 먹으면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금 돌아가고 시간이 더 걸리지만 그래도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에 가끔 만나는 풍파도 그냥 나를 단단하게 해주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는 마음이 생겼어요.
생각을 조금만 다르게 했을 뿐인데
난임시술을 시작하려는데 자궁용종이 있어서 시술이 미뤄질 때면 '왜 자꾸 이런저런 이유로 시술이 밀리는 거지? 당장 시작하고 싶은데 왜!'가 아니라, '오! 자궁 깨끗하게 정리하고 시술할 수 있겠구나. 굿잡'으로,
힘들게 인공수정을 끝냈는데 부작용으로 자궁에 물혹이 생겼다면 '비임신 종결도 짜증 나는데 없던 물혹이 생겨? 자궁에 자극을 주면 안된다고? 어이없네'가 아니라 '오! 지난번에 주사 맞기 너무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저자극 인공수정으로 쉬어가는 코너. 좋아, 좋아'로,
이렇게 생각을 조금만 바꿨을 뿐인데 제 마음의 그릇은 다시 제자리를, 아니 더 커지고 있었습니다.
난임이 나에게 남긴 것
난임 때문에 잠시 우울한 세계에 빠져 세상을 비뚤게 보던 제가, 이제는 난임 덕분에 건강하게 생각하고 건강하게 마음먹는 법을 배웠습니다. 난임이 저에게 남긴 것은 힘들고 우울하고 상처 가득한 마음이 아닌 더 건강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알려주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