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야에, 내 생각에 갇히지 말기
자퇴를 결정하고 진행은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상했다. 자퇴라는 게 이렇게 쉬운 과정이라는 게.
학교마다, 상황마다,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도 알지만, 입시 중심의 교육환경에서 학교 밖의 아이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라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내 자격지심인지는 모르겠지만,
학교에서 성적이 눈에 띄게 좋은 편도 아니었고, 특색 있는 재능을 보이는 학생도 아니었던 아이의 가능성(입결)이 보이지 않았던 탓인지…
아이와의 상담도 몇 차례 있기는 했지만, 담임의 전화상담, 면담, 상담교사의 자퇴진행 안내 등 총 3차례의 연락을 주고받은 후 자퇴는 학생과 부모가 결정하시면 된다고 하더라.
자퇴 과정에서 자퇴에 대한 고민의 시간을 조금 더 주기 위한 학업중단숙려제는 권유보다는 선택이라는 분위기였고, 아이의 인생이니까 학교에서는 더 이상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물론 아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아이 자신과 부모인 우리의 몫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의 내면의 고민과 힘겨움을 깊이 있게 바라봐주는 학교는 없었다.
자퇴원을 작성하러 학교에 방문한 날 처음 만나는 교감선생님은 그때야 아이의 자퇴에 대해 알았다는 듯(물론 아니었겠지만), 아이에게 자퇴를 왜 하는지, 의사를 바꿀 생각은 없는지 물어보더라. 담임선생님과 상담선생님의 자퇴서류 작성 안내를 다 받고 난 후였다. 수많은 아이들을 관리하고 교육하는 선생님들의 노고는 충분히 알고 있지만 특별대우를 원하는 게 아니라, 특별히 길을 벗어나는 아이의 자퇴 과정에서 관심과 격려의 시간을 내어주는 게 마침 자퇴당일이라는 게 섭섭하기는 했다. 심지어 자퇴서류를 다 작성한 후에야 나타난 교무부장은 자퇴 후에는 재입학을 번복해도 우리 학교에 다시 들어올 수 없다는 확인인지 협박인지(내 기분이 그랬고, 굳이 이 타이밍에, 그것도 아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교사라니… )를 하고 나갔다.
나갈 사람은 잡지 않는다. 더 이상 너는 우리의 일원이 아니다. 그런 말로 들렸다.
우리의 의사에 의해 자퇴를 결심했지만, 왠지.. 내쫓기는 기분이 드는 건 뭘까…
공교육에서 학생이 학교를 박차고 나가는데 학생에 대한 안타까움은 없었다. 그저 아이 하나가 학교에서 사라진 거였다.
우리의 결정이었기에 뭔가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른으로서 교사로서 다른 선택을 하는 아이를 응원하는 느낌을 줄 수 있었지 않을까…싶은 개인적인 아쉬움이 남았다.
이제 다시 올 일이 없는 아이의 교정을 미련 없다는 듯 가볍게 빠져나왔지만,
알 수 없는 무게가 내 어깨에 더해지고 있었다.
한 아이를 기르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절실히 떠오르는 지금.
기댈 곳은 없다.
이젠 철저히 부모의 몫이었다.
자퇴 후 아이는 걱정이 많은 부모(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학교생활에 준하는 스케줄을 계획하고 스터디카페와 도서관을 다니며 공부도 하고 책도 읽었다. 목표가 없는 상태에서 공부만 하며 학교에, 좋아하지 않는 수업에 묶여 꼼짝없이 보내던 시간들에 여유가 생기니 심리적인 여유감도 생겼다.
아이는 조금씩 웃었고, 남편과 나도 현실적인 걱정은 조금 뒤로 밀어두기로 했다. 병원은 2주~3주에 한번 정도씩 다니며 약물치료를 지속했지만, 의사 선생님도 눈에 띄게 우울수치가 떨어졌다고 하셨다.
공교육의 제도 안에서 벗어난다는 불안이 나를 매일 시험에 들게 했지만,
아이의 변화를 보며 옳은 결정이었다고 남편과 마음을 다독였다.
그 사이 아이는 친구들도 만나며 지냈고,
학교 밖 청소년 기관들의 프로그램들을 선택해 참여했다.
검정고시 준비와 좋아하는 것들, 아르바이트 등 자신의 계획들을 이어 나갔으며,
일반 고등학생답지 않은 마음이 여유와 적당한 게으름도 누렸다.
아이가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남들과는 다르지만 언젠가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갈 거라고 생각했고,
걱정에 쪼그라든 나와 다른 가족들에게 좀 더 여유를 가져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보고 싶은 것이었다.
내가 봐야 하는 건 아이의 변화된 상황과 내면의 불안이었다.
그때의 난 조금 더 여유를 가지며 너그러워야 했고,
조금 더 어른스럽고 신중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이가 좋아졌다는 생각으로 병원진료와 약물치료를 치밀하게 챙기지 않았고,
많은 현실적인 정보들을 물어 온 나는 아이에게 목표를 만들라고, 미래로 나아가라고, 성취를 해서 자신감을 가지라고 채찍질을 계속했다.
그게 내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앞서가는 계획성과 기대감에 기질적으로 대항도 제대로 못하며
내재되어 있던 아이의 불안감은 마음을 가득 채웠고,
끈을 이어오던 학교 안의 친구와도 멀어지는 것이 계기가 되면서
아이는 더 혼자가 되었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느라
봐야 할 것을 못 보고
중요한 어떤 것들을 놓치고 있었다.
멕 애럴의 ‘스몰 트라우마’라는 책에는 “의료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의학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징후와 증상을 ‘심리적’으로 치부하며, 긍정을 위장한 ‘해로운 긍정성’을 통해 잘 이겨내고 있다고,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될 거라고.. 스스로와 아이를 가스라이팅하지 않아야 해요. 해로운 긍정성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도 자주 마음속에 있는 것 같아요. 슬픔, 후회, 고통 등 분명히 나에게 있는 생생한 경험을 처리하지 못하게 하고 감정을 억압하게 하기 때문에 마음속의 트라우마가 되어 어느 순간 자신을 공격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정서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괜찮거나 괜찮지 않은 감정은 없습니다.
모두 내가 마주해 인정해 줘야 하는 나의 마음인 것입니다.
자퇴 이후의 생활은 많은 각오와 다짐이 필요합니다.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요.
경험이 많은 어른의 눈으로 보기에는 당연히 어설프고 마음에 안 드는 상황들이 펼쳐지겠지만 부모가 먼저 조급함을 다스리며 아이를 믿어줘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저도 이 나이에 오기까지 수많은 착오와 선택을 거쳐오며 하고 싶은 것들,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왔고, 아직도 찾아가는 중인 것 같습니다.
저희 아이는 마음의 아픔까지 함께 하느라 더 큰 진통을 더해 겪는 것 같지만, 또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고 보니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도 느낍니다. 나의 편협한 시선으로 내가 딱 아는 만큼만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부분도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안다고 생각한 것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아이를 통해 알게 됩니다.
어떤 날은 아이가 제가 생각에 두지 않던 더 다양한 세상을, 세상을 살아갈 방법을 찾아보고 있더라고요. 뻔한 말이지만 아픈 만큼 성장하는 거겠지요. 그 말을 간절히 믿고 싶기도 해요.
내 시야에, 내 생각에 갇히지 말기.
오늘의 한 줄 깨달음은 쉬이 나오기도 하지만
제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자퇴를 결정했다면
자퇴 후의 일상을 미리 그려보며 아이와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단, 훈계하듯이, 당연하게 그렇게 될 거라는 뉘앙스를 주면 안 됩니다.
-일단 시간이 많아집니다. 처음엔 좋고 여유롭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불안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가족들이 출근하거나 등교할 때 집에 혼자 남게 됩니다.
-친구들이 학교에 등교하는 시간에는 연락이 어렵고, 초기에는 잘 만나서 어울리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생활환경이 달라져서 공통적인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가기 어려워져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낮에 돌아다니는 청소년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이 있습니다. 학교 밖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존재합니다.
-미성년의 연령이나 자격제한(중졸이하는 더 힘들어요)으로 아르바이트 등의 직업탐색 및 체험이 제한적입니다.
-모든 계획과 책임을 스스로 감당해야 합니다. 필요한 정보 찾기, 공부 계획, 시간 관리, 문제집 선택, 학원 선택, 인강 선택, 모의고사 신청 등등 모든 것이 본인의 역할이며 선택이 됩니다.
검정고시에 대해 미리 준비해 보세요.
검정고시는 년 2회(4월, 8월 중) 진행되고, 약 2개월 전에 원서접수를 할 수 있습니다.
단, 초,중학교는 시험 공고일 이전까지 정원 회 관리자로 분류되어야 하고, 고등학교는 시험 공고일 6개월 전에는 자퇴처리가 완료되어야 하므로 자퇴 일정에 따라 그 해에 시험에 응시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진학이든 진로(아르바이트 포함)든 고졸 자격은 꼭 필요합니다. 수능에 비해서는 검정고시의 난이도가 낮은 편이지만 생각보다 점수가 낮게 나올 수가 있으므로, 자퇴에 대해 생각할 때 검정고시 기출문제를 풀어보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교육청 홈페이지: 검정고시 공고문 등 확인
-학교 밖 청소년 지원 기관: 지원 및 관련 내용 상담 가능
-국가평생교육진흥원 검정고시지원센터 홈페이지: 기출문제, 학습자료, 관련 교육기관에 대한 정보
어차피 주어진 시간이라면 다양한 경험들을 채워 보세요.
진학이나 진로에 대한 목표가 뚜렷하지 않다면 또래 학생들에게는 부족하지만 내게는 주어진 시간들을 잘 활용해서 다양한 경험들을 채워보세요.
테마를 정한 여행도 좋고,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박물관투어, 궁투어, 박물관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미술을 좋아한다면 색다른 전시들을 찾아 순회해 보세요. 음악을 좋아한다면 뮤지컬이나 연주를 감상하는 것도 좋겠죠? 그 밖에도… 자신이 좋아하지만 시간이 없어 할 수 없었던 것들을 지금 누려 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목표가 없어도, 좋아하는 것을 아직 몰라도 경험을 통해 나의 니즈나 운이 많이 좋다면 미래의 단서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청소년지원센터의 직업 인턴쉽 프로그램을 통해 진로 탐색을 해보거나 청소년단체 활동을 통해 다른 생각들을 가진 청소년들과도 교류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나쁘고 위험한 일만 아니라면 흠뻑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건 오히려 부담스럽고) 눈감아 주세요. 어차피 아이가 만들어 갈 시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