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있던 시절, 저는 주기적으로 다른 병사와 단 둘이 초소를 지키는 일을 했습니다. 2시간 동안 가만히 서서 앞을 보는 근무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같이 들어간 병사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눠야 하는 상황이었죠.
21살의 저는 주로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습니다. 상대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여러 일들과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주로 그 말에 맞는 리액션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아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제가 말할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한창 대화를 하다가 이젠 제 이야기를 해보라는 뜻으로 저에게 질문을 하면 정말 난감해졌습니다. 초중고 그리고 대학교 1학년 시절동안 아무런 특별한 일도 연애 경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제가 주로 사용한 방법은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제 이야기인 척 꾸며서 말하거나 대화 주제를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나름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무난하면서 괜찮은 삶이 아니라 남에게 이야기할 거리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그런 재미없는 삶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죠. 취향도 경험도 없는 자신을 자각하는 그 순간은 참으로 힘이 빠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따라서 전역 이후엔 그동안 비어있던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가장 먼저 부모님이 고른 가구들로만 채워진 제 방을 싹 치우고 직접 물건을 골라 채웠습니다. 책장에는 지금까지 타인이 사준 책들을 버리고 스스로의 의지로 읽은 책들을 넣었죠. 다양한 경험을 위해 동아리에도 가입하고 혼자 여행을 가기도 했습니다.
이후엔 5년 정도가 흘러서 이젠 꽤나 취향이 구축되어 가고 있다는 실감을 얻었습니다. 독서에서도 자신만의 취향이 생겼고 음악도 좋아하는 장르와 가수가 생겼으며 기억에 남은 경험도 어느 정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쌓아온 취향이 있었음에도 사실 아직까지도 남에게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라는 생각은 썩 들진 않습니다. 여전히 내 이야기를 해보라는 질문에는 난감해하고 재미있었던 일이 무엇이 있었냐고 물으면 고민만 하다가 대화 주제가 넘어가곤 합니다.
그러던 중 얼마 전 동창 친구들을 만나 술을 먹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말하며 왁자지껄 떠드는 시간이었는데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열심히 이야기를 들으며 적당히 리액션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 자리에서 나오는 여러 에피소드들 속에 모두 제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는데요. 아무래도 같은 공간에서의 기억을 공유하기 때문이겠죠.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좋아하고 즐기는 에피소드들은 모두 제가 함께 겪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토록 찾던 남에게 이야기할만한 즐거운 썰들은 이미 기억 속에 있었던 것이죠.
이를 통해 경험의 유무가 문제의 원인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이미 있던 기억들에 '재미없는 것'이라고 라벨을 붙인 것이 문제였던 것이죠. 이를 다르게 말하면 그동안 스스로의 삶을 재미없다고 단정지은 채 살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소재가 많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경험이 남에게 닿아도 괜찮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 위해선 일단 그 경험을 좋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니 말입니다.
지난 5년 동안 쌓아온 취향과 경험들이 아주 무의미하진 않겠지만 삶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진짜 필요했던 것은 더 많은 재료들이 아니라 이미 있는 재료들을 의미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자세였습니다. 그동안의 시간들이 고작 2시간 동안의 술자리 때문에 깨달음이 뒤집혔다는 점이 조금은 안타깝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조금은 더 공정하게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