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만 몰랐던, 힘들었던 나의 삶
닥치는 대로 내 모든 생각들을 적기 시작한 이후, 나름 큰 의미가 있는 것을 적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우울해진 이유에 대해 나름의 추정을 한 것이다.
되돌아보면, 나는 연초에 내가 원하던 것을 다 만족했었다. 직장 상사의 인정, 직장 동료의 인정, 주변 사람들의 인정, 가정의 평화 등의 것들을 모두 이뤘다. 하지만 나는 우울해졌고, 왜 우울해진 것인지 알지 못한 채로 자살시도를 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었다. 그리고 입원 초기에 깨달았던 것들 중 하나는, 나의 자살 시도들은 모두 내가 죽고 없어진 이후 남겨질 사람들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즉, 내 삶의 이유에 나 자신은 일원어치도 없었다. 이 생각 이후에,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계속해서 고민하며 적어 내렸다. 이후 얼마 안 가 그 적어 내림으로부터 뻗어 나온 몇 가지 큰 줄기들을 발견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부모님은 항상 바쁘게 일하셨기 때문에 나는 친척들과 외할머니께 맡겨져 자랐고, 8살의 나이 차이를 두고 동생이 태어난 이후엔 부모님께서 동생을 챙기는 데에 급급하셨다. 나는 그런 동생을 너무나도 질투했다. 동생이 태어난 이후 줄곧 '나도 관심받고 싶은데, 나도 사랑받고 싶은데, 왜 나는 안되고 동생은 되는 거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어린 날의 나는 부모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알아서 잘하기' 전략을 택했다. 부모의 관심 없이도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좋은 성과를 내어 보여주고, 어린 동생을 잘 돌보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렇게 해야만 부모님이 잠깐씩은 나를 봐줬고, 난 그게 좋았다.
어렸을 적 어느 날 술에 취해 들어온 아빠의 휴대폰을 본 적이 있다. 아빠의 휴대폰에 내 번호는 '나의 희망'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부모님이 지금의 불행을 벗어나 잘 살기 위해선 내가 잘해야 하고 완벽해야 한다는 이상한 책임감을 가지게 된 게. 나는 그들의 희망이었으니까, 내가 바로 그들이 필사적으로 일해야 했던 이유였으니까. 그렇게 난 알아서 잘하는 자랑스러운 첫째 딸이 되었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부모님은 챙기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 첫째 딸에게 점점 관심이 줄어갔고, 난 점점 더 관심을 받기 위해 더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그건 통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관심을 원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홀로 고립되었던 것 같다. 내가 관심을 계속 원하면 나는 계속 관심을 얻지 못해 상처를 받으니까, 그냥 관심을 얻고 싶다는 마음 자체를 지워버렸던 것 같다. 그 결과, 난 부모님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홀로 선 아이가 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부모님께 관심받고 싶지만 관심받지 못한, 의지하고 싶지만 의지하지 못한 홀로 서야만 했던 아이'였다는 것을, 이런 과거 이야기들을 적어 내리면서 깨달았다.
그래서 내 삶의 목표는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 혹은 남들의 도움 없이 나 스스로 완벽히 해내는 것 따위가 되어 있었고, 나 자신의 기준이나 만족감, 성취감 같은 것들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내가 생각했을 땐 이 정도면 충분한데, 남들은 더 하니까 더 해야지' 정도의 것이 아니라, 정말 애초에 내 생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남들이 '잘한다.'라고 하는 것이 삶의 기준이 된 채로 살아왔던 것이다. 내 삶의 이유엔 '내 생각'이란 것이 존재하질 않았다. 그런데, 연초에 그런 남들이 '잘한다.'라고 하는 그 기준을 드디어 만족해 버렸다. 하지만 난 하나도 기쁘지 않았고, 내 삶의 그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기준을 만족한다면 무언가 엄청난 것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오히려 외롭고 초라하기만 한 나 자신을, 나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나 자신이 아닌 남들의 기준에 맞춘 목표를 달성하려고 부단히 애썼던, 힘들게 살았던 나 자신을, 그리고 홀로 외로이 참아왔던 어린 날의 나를 이제야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우울해졌던 것 같다. 삶의 목표를 이뤘는데 달라지는 것이 없어서, 더 이상 삶을 살아갈 이유를 모르겠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