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인류가 세상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믿었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지는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약속된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고 믿었던 기술의 발전은 인류를 더 큰 혼란과 고통 속으로 던져 넣었다. 우리는 불변의 진리처럼 느껴지던 사실들과 법칙들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발견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항상 구원의 손을 내밀었던 신의 얼굴이 실존 뒤에 가려지기 시작했고 삶은 무의미해 졌다. 이때 사람들은 질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삶은 지속적인 고통이고 우리가 맞이하는 최후는 모두 변함없이 죽음이다. 그렇다면 과연 살아가는 일에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실존주의’라는 철학 사조가 등장한다. 인간에게는 세상에 태어날 때 정해진 목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역동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이다. 프랑스의 젊은 작가 ‘알베르 카뮈’는 이런 실존주의 사상을 자신의 저서 <이방인>에서 날카롭게 다루고 있다.
소설 <이방인>은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주인공 '뫼르소'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생전에 어머니가 지내던 요양원에 찾아간 뫼르소는 어머니의 관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꾸벅꾸벅 조는 등 타자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납득하기 힘든 태도를 보인다. 장례식 중 요양원에서 평소 어머니와 친하게 지내던 노인들은 눈물을 흘리지만 정작 고인의 아들인 뫼르소는 햇빛이 너무 뜨거워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그는 일상으로 복귀한다. 연인인 '마리'를 만나 해수욕을 즐기기도 하고 영화도 본다. 이때 뫼르소는 마리와 함께하는 것은 좋지만 자신을 사랑하냐는 그녀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못한다. 또 뫼르소의 옆집에는 '레몽'이라는 미덥지 못한 이웃이 하나 살고 있는데 그는 자신을 떠난 연인에게 복수할 추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며 뫼르소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를 승낙하고 레몽은 전 연인에게 복수한다.
이렇듯 뫼르소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도, 옳지 않은 일에 가담하는 것에도, 심지어 사랑하는 이 앞에서도 무신경하고 냉담한 태도를 유지하는 다소 이질적인 인물이다. 삶의 덧없음을 자각하고 있는 뫼르소는 특정한 목표도 열정도 없이 그저 살아가며 자신의 삶으로부터 분리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그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레몽과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간 해변에서 우발적인 계기로 한 아랍인을 죽이게 된 일이다. 이때 그가 아랍인을 살해하게 된 동기가 다소 의아하다. 뫼르소는 직접적으로 공격 받거나 위협을 당해서가 아닌, 그저 상대가 꺼내 든 칼날에 햇빛이 비추어 눈이 부셨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방아쇠를 당겨 버린다. 그는 재판장으로 넘겨진다.
이때 '태양'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왜 그저 햇빛 때문에 아랍인을 죽이게 되었을까?
이 작품에서 뫼르소는 총 두 번 태양을 마주하고 고통받는다. 첫 번째는 어머니의 장례식 행렬에서였고, 두 번째는 아랍인을 살해한 그 해변에서였다. 그는 타오르는 태양을 마주하며 삶의 덧없음,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마주봤던 것이다.
감옥에 투옥되고 나서 그는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누렸던 인생과 감옥 속 현실 사이의 괴리에 시달리며 자기의 삶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뫼르소는 살인 혐의에 대해 여러 차례 심문을 받지만 이상하게 재판은 사건의 중심을 벗어나며, 주인공인 뫼르소를 소외한 채로 전개된다. 뫼르소는 정직한 대답만을 고수하고('그것은 태양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계획적 살인을 저지르고도 충분히 남을 냉혈한이라고 단정 짓는다.
결국 재판장은 뫼르소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사형을 선고받고 나서야 뫼르소는 자신의 남은 삶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화를 내고, 의견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마침내는 삶을 갈망하기까지 한다. 이때 그가 억압되어 있던 감정들, 욕망들, 반항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뫼르소는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나서야 자유로워진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뫼르소는 모든 인간은 죽기 때문에 모두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인 처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종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뜻으로 전 인류와 일종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독자들은 카뮈가 실존주의에 대해 갖는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언젠가 죽어야 하기에 삶은 덧없고 부조리한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삶을 지키고, 다른 이들과 연대하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현대인들이 그렇듯 나 역시도 삶이 쳇바퀴처럼 굴러가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새로울 것이 전혀 없는 하루.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정해진 행동을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일. 눈앞의 성과를 위해 노력하다가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고 그럴 때마다 맥이 탁 빠지는 느낌만이 들었다. 나는 그저 숨만 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고 이 광활한 우주를 생각하면 먼지보다 훨씬 더 작을 내가 너무 하찮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어느 날엔 지하철을 탔다. 비가 오는 날이었던 것 같다. 눅눅한 공기가 숨을 턱 막히게 했고 흙냄새를 닮은 비 특유의 냄새가 코 끝에 맴돌던 것이 기억이 난다. 사람들은 정렬을 맞추어 두 줄로 서고, 홍해가 갈라지듯이 내리는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나면 몸에 각인된 동작으로 지하철에 올랐다. 모두 똑같은 표정이었다. 빛을 잃어버려 초점이 없는 눈은 휴대폰에 고정해 둔 채였다. 나는 비 오는 날 지하철이 가진 특유의 습한 공기와 에어컨에서 나오는 인공적인 바람을 느끼며 그대로 서 있었다. 내가 쓰고 있던 헤드폰에서는 베이스가 울리는 나른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 내가 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노래를 잠시 멈추고 헤드셋을 벗었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속삭이는 소리와 열차가 철로 위에서 덜커덩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의 한숨소리, 발작적으로 터져 나오는 재채기 소리, 그리고 공중으로 흩어지는 고등학생들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한 군복 입은 청년이 구부정하게 서서 휘청이는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을 보았다. 짧은 순간 그들이 주고받는 미소를 보았고, 다정한 감사 인사가 오가는 것을 들었다. 시선을 돌리자 서로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는 가족들, 친구들, 연인들이 보였다. 그날 나는 비어 있는 지하철의 분홍색 의자를 보면서 일종의 깨달음을 얻었다. 삶에는 의미가 없고 우리는 모두 하찮은 존재들이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앞에는 모래알처럼 무수히 많은 삶이 놓여 있다. 어차피 태어났으니 내 인생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모두에게 의미 없는 인생이니 하찮은 존재들끼리 뭉쳐서 배려하는 친절한 세상을 만들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인 시시포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언덕 위에서 돌을 굴려 올라가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바위는 경사진 언덕 꼭대기에 다다르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때문에 시시포스는 이 의미 없는 짓을 계속 반복해야 한다. 그의 모습은 놀랍도록 인간의 삶과 닮아 있다. 다시 떨어질 돌을 굴리는 일, 언젠간 무너질 모래성을 쌓는 일, 아무 의미도 없는 성공과 성취를 이뤄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 고군분투하는 일은 똑같은 일처럼 보인다. 나는 이런 허무함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좋은 건물, 좋은 차, 많은 돈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베풀 수 있는 잠깐의 다정함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혹은 일상에서 나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 사소하고 무용한 것들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시시포스가 돌을 굴려야 한다면-콧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춤을 추면서 올라가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지하철에서 내리고 나서 카페에 들러 마들렌 하나와 커피 한 잔을 사 먹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마들렌과 적당히 산미가 있는 커피였다. 이런 것이라도 소중히 여긴다면 삶을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를 나서며 뒤따라 나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살짝 잡았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멎은 듯했다. 하늘이 유난히 청명해 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