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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재경 Jul 15. 2024

홍상수.

슴슴한 맛

홍상수 감독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0. 상수 같은 영화


바라봐줘요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스틸 이미지로만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빙 이미지로만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글로 전달될 수 없는 것을 구현해 내는 영화들을 좋아하고, 누군가 나에게 "이 영화는 무슨 내용이야?"라고 물어보았을 때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아 가슴이 턱 막혀오게 만드는 영화들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느낀 무언가에 최대한 다가가서 이해해내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게 만드는 감독들이 있다. 그중 한 명이 홍상수 감독이다.


1. 객관적 단점 / 주관적 해석


다 말들이야 말


대학교 막학기 때 홍상수 감독에게 빠졌다. 홍상수의 영화가 지나치게 담백한 만큼 빠졌다고 하기엔 민망한 구석이 있지만, 어쨌든 주말 밤에 시간이 비면 모니터로 아무 홍상수 영화나 틀고 침대에 누웠다. 이렇게 말하고 다니면 사람들의 반응은 주로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첫번째는 “홍상수? 부인 두고 바람피운 나쁜놈 아니야?” (맞다.), 두번째는 “홍상수? 영화에 너무 깊이가 없어. 차라리 로메르는 알게 모르게 깊이라도 있긴 한데.“ (맞다.) 세번째는 “홍상수? 나르시시트라서 싫어. 영화들이 자기 자신에 너무 취해있어.” (맞다.) 이렇게 기출문제가 뻔함에도 불구하고 반박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도 그들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사실 의견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하기에 동의할 필요도 없다. 홍상수는 바람을 피운 것은 사실이고, 영화가 얕으며 영화 속 주인공은 자기 자신의 다른 모습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들을 나쁘게만 해석하지는 않는다. 바람을 피운 것은 그래, 당연히 나쁘지만 나는 그의 작품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 작가와 작가의 작품을 분리할 수 없다는 이론적인 반박을 한다면 나도 크게 할 말은 없다. 특히 홍상수와 같은 경우에는 그의 삶이 영화에 적나라하게 반영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홍상수가 필모그래피를 지워내야 할 정도로 큰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김기덕이나 폴란스키와 같이 실제 성범죄에 연루된 감독들과 홍상수를 같은 선상에 놓고 나쁜 놈들 영화는 보면 안돼! 라고 소리치는 것은 홍상수에게만 지나치게 엄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론과 반대로 실제에는 다양한 무게의 추들이 있고, 그것들을 어떻게 저울질할 것인가는 관객의 주관적인 몫이다. 나는 도덕덕 기준이 중요하다고 해도 홍상수의 죄의 무게는 비교적 가볍다고 보고 (또는 객관적인 개념으로서의 죄라기보다는 개인적 / 사회적 통념상 죄에 속한다고 보고), 그것을 제하고 홍상수 영화를 본다.


가장 최근에 본 홍상수 영화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인데, 김주혁이 주연으로 나오는 홍상수 작품은 처음이었다. 김주혁이 나온다고 해서 영화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홍상수 영화가 얕다고 표현할 때에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첫번째로는 모든 홍상수 영화들이 똑같게 느껴진다는 것과, 두번째로는 실제로 홍상수 영화들이 의미 없는 주제를 가지고 내러티브 없이 흘러간다는 것. 둘 다 결국 홍상수라는 사람의 스타일과 관련된 이야기이기에 연결되어 있지만, 우선 전자의 문제에 대해 담론하자면 나는 그의 모든 영화들이 똑같이 느껴져서 너무 좋다. 그저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을 보게 된 이유도 가볍다. 금요일 오후 네시에 일찍 퇴근하고 호텔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씻고 침대에 누워보니 저녁 약속시간까지 한 시간 반이 남은 것이다. 아, 뭐하지—홍상수 영화나 봐야겠다—하고 처음에 뜬 영화가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었다. 영화를 후딱 보고 가벼워진 마음을 가지고 친구를 보러 나갔다.


모든 영화들이 똑같다고 하는 것은 그의 영화가 예상 가능하다는 것인데, 나는 이 코멘트 자체가 홍상수가 얼마나 독자적인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내가 한 시간 반 붕 떴을 때 부담없이 영화를 볼 수 있는 감독은 홍상수 밖에 없다. 내용과 주연배우,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들은 영화마다 조금씩 다르다고 해도 나는 영화관으로 들어가며 그들이 무엇에 대해 대화할 것인지, 담배를 얼마나 태울 것인지 무의식 중으로 알고 있고, 또 홍상수가 얼마나 길게 테이크를 잡을 것인지, 어떤 상황에서 줌인을 할 것인지도 무의식 중으로 알고 있다. 이것을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굉장한 편안함을 선물해 준다고 생각한다. 매일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가야 하는 바쁜 일상 속에서 참여자가 아닌 숨은 관찰자로서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줘서 고맙다. 그렇게 관찰하는 사람들의 대화와 기싸움들은 너무 소소해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게 의미 없는 대화하고 살아가는 것이 내 모습이고 인생이다. 극 중 캐릭터로 등장하는 영화감독은 한심하고 찌질하지만 그것도 내 모습이고 인생이다. 내 인생엔 사실 상징성도 없고 모방해야 할 의미 같은 것도 없고 그냥 흘러가는 내 인생이다. 그의 인생이기에 내 인생이고 너 인생이고 우리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사람이라는 것이지만 그 정도로면 충분하다.


홍상수가 의식적으로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가 한국에서는 공식석상에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해외 영화제에서 나와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뉴욕영화제 (NYFF)에서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면 여기 왜 왔나 싶을 정도로 답변을 간결하게 한다. 관객석에서 한 평론가가 당신 영화 속 남자들은 왜 그렇게 한심한가요, 라고 질문하자 홍상수는 그런 것을 새삼스럽게 왜 물어보냐는 듯이 나는 그냥 세상을 그대로 표현하려고 할 뿐이다라고 답변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다른 학생은 당신을 너무 존경한다며, 자신처럼 필름메이커가 되고 싶어하는 학생들에게 조언을 해달라고 하자 웃으며 “No.”라고 한마디만 뱉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이것이 그의 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는 철저히 자신의 주관으로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토대로 영화를 만들고, 이것이 진실이라거나 이렇게 살라고 하거나 너네가 잘못됐다는 등의 가치판단은 철저히 배제한다. 그렇기에 남에게 조언하기도 거부하며 자신의 영화가 객관적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하거나 평론가들이 그렇게 생각해 주기 바라지도 않는다.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그의 영화도 지나치게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나는 메시지 전달을 극도로 거부하는 그의 태도에서 역설적으로 전달되는 어떠한 “주관성에 대한 존경”을 좋아한다. 나는 나만의 이유로 나의 영화를 찍을 뿐. 너네가 봐주면 너무 고맙지만 보지 않아도 나는 찍을 뿐. 겸손하면서도 자신감이 느껴지고, 이러한 태도를 가진 감독들이 많아야 영화라는 매체가 더더욱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창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을 좋아하던 시절에, 대체 미국인들이 왜 하루키에게 열광하는지 의문을 품었던 때가 있다. 한 미국 평론가의 말로는 하루키의 책을 읽는 것은 마치 동네 아이스크림 샵을 가는 것과 같아서, 그의 책들이 엄청난 서프라이즈가 있거나 인생을 바꿔놓거나 하지는 않아도 슴슴하고 항상 기대에 부응하기는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홍상수의 작품들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동네 아이스크림 샵보다도 좁은 범위의 메타포가 필요하다. 홍상수 영화는 나에게 쌀밥같다. 대학교 때 학식으로 샌드위치나 파스타를 사흘 연속 먹으면 나흘째에는 밥에 김이라도 싸 먹어야 되듯이, 영화도 언제나 이창동 (같이 고통과 카타르시스를 동반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나 PTA (같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감독)만 보고 살 수는 없다. 그렇기에 홍상수가 매년 베를린이나 베니스 가서 상 받고, 유럽인들에게는 하이컬처로 여겨지는 영화를 만들어도, 나에게 있어서 홍상수는 파인다이닝 같이 일시적이지만 큰 즐거움보다는 쌀밥과 같이 작지만 항상 필요한 행복을 선물해주는 감독이다. 그래서 나는 쌀밥에게 도덕이나 깊이를 요구하거나, 개인적임을 탈피한 보편적인 의미 따위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2. 주관적 장점 / 객관적 해석


그랬대


위의 이야기들은 굉장히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다. 그러나 연인과 사랑에 빠질 때도 그렇듯이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으레 이성적으로 정당화시킬 수 없는 이유일 때가 많다. 연인에게 “너는 내가 왜 좋아?”라고 물었을 때 그가 일초만에 “나는 네가 이뻐서 좋아”라고 답변하가나 “나는 네가 열심히 살아서 좋아”라고 말해준다면 나는 그의 사랑을 의심할 것이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 일상생활 가능하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이 정도로 내가 미친놈은 아니지만 대충 추상적인 이유 한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 사랑은 깊이 있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다. 내가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데가 많다. 아래는 그 이유들을 나열해 놓았다.


우선 홍상수 영화를 보면 한국이 보인다. 나는 해외에서 오래 생활한 만큼 보지 못한 한국이 많다. 초등학교 때에는 2년 동안 없었고, 고등학교 때는 4년 내내 없었다 보니 나에게 한국은 스무 살 넘어서 경험한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 홍상수는 그 갭을 채워준다. 그저께 본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2016년작인데 홍대에서 촬영했다. 영화 초반에 권해효가 카페에서 나와 자전거를 타고 합정의 아파트 단지로 달려가는 모습은 정말 아무 의미 없지만 내가 겪어보지 못한 한국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했다. 겪어보았다고 해도 “그때 그 시절” 한국의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담아둔 영화들은 많지 않은데, 홍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그 시절의 한국이 보인다. 2000년대 초중반 한국이 보고 싶다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유지태가 짜장면을 먹는 모습을 보면 되고, 2010년대 초중반의 한국이 그립다면 <북촌방향>에서 유준상이 포장마차 앞에서 담배를 태우다 후배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 된다. 애초에 영화라는 매체가 픽션이기 때문에, 아무리 영화가 훌륭해도 그 시대를 솔직하게 담고 있는 영화들은 정말 몇 안된다.


홍상수 영화는 나에게 근거 없는 믿음을 부여한다. 나는 비이성적이어서, 아무리 누군가가 30분 동안 근거를 가져와서 나의 생각을 바꿔놓으려고 해도 때로는 영화 속 주인공이 대사 하나 치면 그것이 나의 믿음이 되는 경우가 있다. 홍상수 영화를 보면서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홍상수는 그런 차원에서 훌륭한 연설가이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을 보면서도 몇 개 적어두었다. “남녀 문제는 둘이 알아서 하는 거야.” (맞아, 내가 너네에 대해서 너보다 잘 알겠냐.) “술은 원래 취하려고 마시는 거예요.” (그렇지, 맛도 없는데 취할 거 아니면 커피 마시지 그냥.) “정말 아무것도 다하라 그러면 선생님도 애기죠? 머리만 하얗지.” “귀여워, 머리만 좀 하얗지 않았으면.” (아, 나도 슬슬 흑발로 염색해야 되나?) “그건 그냥 말이 아니고, 실제 있는 일이야. 아니 그건, 내가 실제로 들은 게 아니잖아, 본 게 아니잖아. 얼굴을 보고, 눈을 보고, 말을 들은 게 아니잖아, 다른 사람 말을 들은 거잖아.” (그렇지. 본인에게서 직접 들어야지.) “진짜 사랑하는거, 사랑만이 가치가 있어! 나머지는 다 요식행위야.” “아냐. 인생은 다 필요한거야. 하나도 안필요한거 없어.” (요식행위도 다 필요한 것이다.)


홍상수는 솔직히 노력도 안 하는데 영화 찍는 당일 아침에 휘갈겨 쓴 대사들이 나에게 꽂히니 분하다. 그래도 가끔은 내가 평소에 무의식적으로라도 생각하고 있던 것을 홍상수가 말해줘서 좋다.  “난 아무것도 중요한 게 없어. 다 말들이야 말.” (그래 맞아. 말은 말일뿐이고, 누구도 아무 말이나 아무 때나 할 수 있지.) 또는 연인과 헤어지는 방법을 배우기도 한다. “이제 그만 만나요. 그래요, 우리 서로 각자 재밌게 지내봐요. 그래요, 한 동네니까 가끔 봐요. 네~” (그렇다. 현실에서 헤어지는 것은 그렇게 드라마틱하거나 아름답지는 않은 것이다.) “그럼 그냥 즐기세요! 우리가 그렇게 아는 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래, 서로 깊이 알아서 뭐 하나 즐기면 됐지.)


홍상수 영화에 등장하는 유준상과 권해효가 좋다. 홍상수의 페르소나 중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고르라면 1등은 유준상, 2등은 권해효.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에게는 홍상수와 같이 부담 없는 기품이 있다. 또 홍상수 영화는 롱테이크가 너무 많아서 배경을 하나하나씩 곱씹어볼 수 있어서 좋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여주인공이 카프카 단편선을 읽고 있고 <변신>이라고 표지에 쓰여있는데 이걸 왜 넣었을까? 사실 그날 아침에 책장에서 처음 보인 제목이 <변신>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홍상수의 스타일상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런 상상이라도 천천히 해볼 수 있도록 배경을 훑어주는 것이 좋다. 마지막으로는 홍상수 영화에서 문이 닫히고 닫힌 문을 2초 정도 길게 보여주고 끊는 것이 좋다. 여운이 남기도하고, 그냥 사람이 들어가고 문이 닫히는 모습이 김뜻돌의 노래제목을 빌리자면 하나의 작은 종말 같다. 작은 종말과 새로운 시작.


아무튼 홍상수는 나에게 소중한 감독이고, 매년 똑같은 작품들을 찍어낸다고 해도 나는 계속해서 볼 것이다.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그저 매년 등장해 주는 것이 고마울 뿐이고, 아직 보지 않은 그의 영화들이 많다는 것이 행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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