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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재경 Sep 01. 2024

스타카토.

끊기는 일상들의 반복


요새는 일에 치이며 살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어김없이 출근하면서 인스타그램을 켰다.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가 한 인터뷰가 피드에 올라왔다. 아무리 바쁜 일상이어도 하루에 한 페이지만 쓰라고. 그렇게 매일 쓰면 365페이지가 되고 하나의 각본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각본을 쓰지는 않지만 그의 말을 들으니 하루에 한 페이지 정도는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주 목요일쯤에는 극한으로 우울했다. 밤 아홉 시에 오피스에서 앉아 허공을 응시하며 앞으로 적어도 여섯 시간은 이 의자에 더 앉아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그날 새벽 세시에 퇴근하고 세 시간 자고 일어난 금요일도 고통스러웠지만 그날 밤 집에 돌아가니 잠을 퍼질러져 잘 생각에 행복해졌다. 나의 우울함은 사실 그냥 수면부족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저께는 벤치에 앉아서 앞을 바라보는데 나무가 흔들렸다. 그냥 흔들린 것이 아니라 잔잔하게 흔들렸다. 마치 내가 고개를 든 순간을 기다린 듯이 흔들렸는데 영상에 담아야겠다 싶어서 핸드폰을 들었는데 나무가 흔들림을 멈췄다. 나는 그 순간을 영상으로 담지 못하여 이렇게 글로 박제해 둔다. 그것은 분명 나에게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최근에는 생각을 하면 생각이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짧은 문장들이 떠오를 뿐 그 문장들을 줄지어 이야기를 만들지 못한다. 성격이 급해진 것인지 나의 뇌가 굳은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사는 곳은 바람이 강하게 분다. 내가 사는 곳 근처에는 골목길이 하나 있는데 밤에는 노숙자들이 이곳으로 몰려와서 취침한다. 그들은 예의가 바른 것인지 눈치를 지나치게 보는 것인지 아침 아홉 시만 되면 감쪽같이 사라진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언제부터 낮에 사라지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가끔 그들이 남기고 간 사과나 복숭아 등이 벤치에 있고, 그와 함께 어떠한 찌린내가 벤치에 퍼져 있는데 나는 그것이 괜찮다.


샌프란에서 사는 이십대라면 두 가지 부류의 집들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내가 살고 있는 호텔 같은 고층건물이고 다른 하나는 위쪽에 있는 가정집 같은 구조물들이다. 마크 트웨인이 한때 자신이 경험한 가장 추운 겨울은 샌프란시스코의 여름이라고 했다는데 나도 그런 것 같다. 날씨는 영상 십오도라지만 이상하리만큼 속이 시리다. 여름은 여름다웠으면 좋겠다. 서부는 외계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우리집이 좋다가도 호텔에 사는 것 같아서 싫을 때도 있다. 인간다움이 없달까. 새집냄새도 난다. 아무래도 그래서 빨래를 안 하는 것 같다.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순수예술을 하는 친구에게 영상을 통해 시간을 가두고 싶은 나의 욕망을 말해주었더니 예술을 하려면 그러한 강박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미 작업한 것에 하나하나씩 덧칠해 나아가려면 저번에 가둔 시간을 지워내야 하는데, 이것이 현실을 베끼는 것에서 벗어나 오리지널한 무언가를 창조하는 시작이라고. 나도 그 말에 동의했지만 나의 본능은 그 이상의 노력은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시간을 잡아두고 싶어서 영상을 찍고 편집한다.


사실 요새는 글이 잘 써지지 않아서 카메라를 들었다. 글을 쓰려 누우면 답답한 마음이 있는데 그것이 언어로 표출되지 않았다. 글은 남이 읽어야 하는데 그때 내가 써 내려간 글들은 문장이 아니라 이상한 단어들의 연발일 뿐이었다. 그게 시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내가 쓴 것을 다시 읽어보니 전혀 아름답지 않아서 시는 정말 순수재능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나는 줄지은 단어들이 남들에게도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다. 어제는 카페에 갔다가 옆자리에 글을 끄적이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연필로 일기장에 글을 쓰고 있었는데 그가 나처럼 핸드폰의 메모장에 글을 쓰면 다른 글을 쓸까 궁금했다. 그도 중간에 거리로 나가 담배를 피우는데 표정이 정말 담배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아서 멋있었다.


요새는 술을 잘 먹지 않는다. 일이 바빠서인지 술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하는 것은 나에게 건강을 선물해 주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저번 주 금요일에는 오피스에서 나와서 커피숍으로 갔다. 걸어가는 길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에 그려진 빨간 사람을 바라보는데 문득 나는 내가 평생 죽지 않을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면 나는 지금처럼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지금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내일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라고 말하는데 그게 말이 되는 조언인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나는 언젠가 죽어야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살면 나는 조금 다르게 살지 않았을까.


그저께는 창문을 열고 출근했다. 새벽 두 시쯤 퇴근해서 방으로 들어오고 나서 이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집 창문은 방충망이 없어서 창문을 개방하면 말 그대로 개방이다. 고층인 만큼 주변에 벌레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침대에 누우니 웬 매미소리가 들려서 불을 켰더니 램프 안에 매미 한 마리가 들어가 있었다. 내 램프는 개미지옥 같은 구조로 되어 있어서 불빛에 이끌려 들어간 매미가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매미를 좋아하지 않기에 구하지 못한 벌레 스프레이 대신 손세정제를 가져와서 램프 안으로 마구 뿌리고 위에 비닐봉지를 씌워 산소를 차단하여 매미를 죽였다. 다음날 아침 확인해 보니 매미는 배를 뒤집은 채로 죽어 있었다. 나는 죽은 매미를 보고 안도했다.


나는 이제 파티도 즐기지 않는다. 서있는 것을 즐기지 않을 수도. 금요일에는 같이 일하는 동료 한 명이 같이 바에 가자고 해서 따라갔는데, 구린 음악을 들고 조금은 애매한 젊은이들이 리듬을 타는 듯 안 타는 듯 고개를 젓고 있는, 나가거나 들어오려면 알아서 사람들을 밀쳐내고 다녀야 하는 그런 땀냄새나는 바였다. 나는 술을 먹고 싶었지만 그 바에 들어가는 순간 정신이 맑아졌고 우버를 불러 집으로 갔다. 집에 가는 길에 내가 죽인 매미 생각이 났는데 갑자기 초등학교 시절 매미는 십칠 년을 땅속에서 보내고 일주일인가 살러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생각이 났다. 나는 아홉 달을 엄마 뱃속에서 보내고 세상에 살러 나왔는데 일주일 살러 나왔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집에 오는 길에 창밖에 비친 펜타닐 중독자들을 보면서 인간에게 평균 팔십 년의 수명을 선물하기에 인간은 너무 나약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 내 삶은 상당히 건조하다. 나라는 존재를 지배하는 감정은 멜랑콜리아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새는 그렇게 멜랑꼴리하지 않다. 일하기 전과 달리 딱히 우울한 것 같지도 않고 행복하다고 말하기도 뭐하다. 미래를 생각했을 때 장대한 꿈에 부풀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미래가 없음에 대해 걱정하거나 하지도 않는다. 영화를 보아도 기억에 상기될 만큼 강렬하게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뇌가 어떤 하나의 순간에 온전히 정착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걸어 다녀도 일 센티미터 정도 붕 떠서 다닌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세상을 떠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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