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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슴속호수 Oct 15. 2024

도로의 난폭자

인생 택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차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타며 귀를 울렸다. 도로는 빗물에 젖어 반짝이는 물결로 가득했다. 운전대를 잡고 힘을 주자 카레이서가 된 것처럼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도로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젊은 시절 빗속을 달리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옆자리에서 아내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빨리. 더 힘차게 달려."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가속 페달에 더 힘을 실었다. 물웅덩이와 흐르는 빗물을 지날 때마다 속도를 더 높였다. 예상치 못한 차체의 흔들림에 등골이 오싹하고 머리끝이 서는 듯한 긴장감이 몰려왔다. 차량이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스쳤지만, 바퀴에 의해 튀어 오르는 물줄기가 퍼지는 장면은 묘한 만족감을 자아냈다.


 비 오는 날 도로를 질주하는 경험은 억눌린 감정이 해방되는 쾌감을 안겨 주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빗속을 달리는 자유는 속도에 홀려 강렬하게 다가왔다. 거센 빗줄기를 가르며 내달리는 마음은 오로지 나만의 세계에 갇혀 미끄러지는 속도의 전율에 몰입했다. 일상 속 스트레스에 지쳤을 때면, 일부러 비 내리는 바닷가의 한적한 도로를 찾아 차를 몰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물을 튀기며 도로를 가로지르던 열정은 잠시나마 도로 위에서 무모한 존재가 되곤 했다.


 도시에서 협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던 시절, 장마철에 열렸던 행사가 있었다. 주차 공간이 부족해 참석자들을 배려하여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행사장으로 향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빠르게 달려온 택시가 내 곁을 스치며 지나가더니 흙탕물을 잔뜩 튀겼다. 젖어버린 양복과 와이셔츠 그리고 축축해진 머리카락 사이로 빗물이 흘러내렸다. 행사 시작을 앞두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집과의 거리가 멀어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미 옷은 흠뻑 젖은 상태였기에 급히 화장실로 가서 흙물만 닦아낼 수밖에 없었다. 사회자로서 행사 진행을 맡고 있던 터라 상황을 묵묵히 견디며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마음속에서는 물벼락을 맞은 만큼의 자괴감과 분노가 끓어올랐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웃으며 이 순간을 넘겨야 했다.


 행사를 마치고 주차한 곳으로 돌아가는 길, 발밑으로는 빗물이 넘실거렸다. 주변은 장마의 습기를 머금은 하늘 아래 온통 짙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물웅덩이를 피하려 허둥대는 발걸음은 서툴기만 했다. 건물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들이 모여 도로를 작은 개천처럼 만들고 있었다. 회색 하늘과 빗방울 사이로 폭포가 쏟아지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여러 대의 자동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지나가며 흙탕물을 분수처럼 튀겨댔다. 흩어지는 물줄기가 쏟아지는 빗방울과 섞이며 온몸을 덮쳤다. 부자연스럽게 이들과 한 몸이 된 마음은 혼란스럽고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우산을 접고 차라리 비를 맞기로 했다. 불쾌하게 튀어 오르는 물보다는 맑은 빗방울을 맞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매섭게 쏟아지는 비와 거센 바람을 맞으며 씁쓸한 마음을 씻어내고 싶었다.


 귀촌 후 다니는 회사 앞 도로는 4차선인데 맞닿은 건널목에는 신호등이 없다. 장마철이면 도로에는 물이 고이거나 시냇물처럼 흐르곤 했다. 비 오는 날이면 늘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게 된다. 그날도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길가에 서 있었다. 멀리서 빠르게 다가오는 승용차는 속도를 줄일 생각 없이 돌진하고 있었다. 급히 우산을 앞으로 내밀어 가까스로 물벼락을 피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우산을 들어 올린 찰나, 거대한 트럭이 순식간에 지나가며 강력한 물줄기를 온몸에 퍼부었다. 옷은 흠뻑 젖었고 분노와 무력감이 교차하며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미 저 멀리 사라져가는 트럭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로에서 마주한 불쾌한 현실을 또다시 체감해야만 했다.


 몇 해 전, 회사 앞에서 다시 한번 더 흙탕물이 튀어 온몸을 적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장면은 내 존재가 그저 흩어지는 빗방울처럼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운전자들 눈에는 내가 잠시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불과한 듯, 그 무심한 시선 속에서 깊은 허탈함과 쓸쓸함이 밀려왔다. 한편으로는, 나 또한 언젠가 빗속을 질주하며 물줄기를 튀기던 날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느꼈던 열정 어린 흥분은 이제 쓴 미소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비 오는 날이면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도시나 시골을 막론하고 왜 운전자들은 빗속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오히려 더 가속할까. 빗길은 미끄럽고 시야가 흐려져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앞다투어 달려간다. 혹시 그들에게 도로 가장자리에 서 있는 보행자는 단지 흐릿하게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 같은 존재일까. 물벼락을 맞는 사람의 존재가 그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걸까. 어쩌면 그들은 질주하는 동안 자신의 속도와 목적지만을 생각하느라 주변의 위험과 다른 사람의 아픔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분노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며 운전하는 습관도 점점 변해갔다. 지금은 비 오는 날이면 더욱 신중해진다. 속도를 내기보다는 보행자에게 흙탕물이 튀지 않도록 한층 더 조심스럽게 운전하게 된다. 예전처럼 도로의 난폭자가 아니라, 책임감 있는 운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빗속을 달리며 나만의 자유를 만끽하기보다는 도로 옆을 지나는 인도와 건널목을 함께 사용하는 보행자 들을 배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장마철이면 우산을 꼭 쥔 채 지나가는 차량을 유심히 바라본다. 물웅덩이 앞에서 속도를 줄여 배려하는 운전자가 있는가 하면, 여전히 망설임 없이 질주하는 차들도 있다. 그들을 보며 과거의 나처럼 무심한 난폭자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비가 아무리 세차게 내려도 도로 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가지다. 속도를 줄이고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다. 나는 더 이상 도로의 난폭자가 아닌, 우산을 쓰고 천천히 걸어가는 보행자로서 비 오는 날의 도로를 새롭게 바라본다. 나의 작은 변화가 누군가의 마음속에 따뜻한 배려로 스며들기를 바라며 빗속의 도로에서 모두가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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