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택시
인생의 큰 고비 앞에서 비로소 진정한 삶의 의미를 다시 묻게 되었다. 아내의 유방암 투병은 긴 세월의 고통을 동반했지만, 여정 속에서 고통을 넘어선 희망의 빛을 찾을 수 있었다. 아내의 건강을 위해 부산을 떠나 자연의 품이 가까운 합천으로 귀촌을 결심했다.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이곳에서 치유의 공간과 마음의 쉼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합천에 도착한 첫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듯 가슴 속에 벅찬 감정을 느꼈다. 소란했던 도시의 기억을 지우고 고요히 세상을 맞이하는 신선한 출발점이었다. 맑은 공기, 아침이슬 머금은 풀 냄새는 깊이 스며들었다. 산책하며 느낀 잔잔한 땅의 숨결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한적한 길목에서 마주한 이웃의 미소는 따뜻하게 다가왔다. 아내의 얼굴에 소박한 행복이 피어났다. 잃어버린 시간이 무게를 잃고 우리를 감싸안는 순간이었다. 삶에 다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봄이면 작은 정원에서 피어난 꽃들은 아내의 웃음을 닮은 듯 은은한 향기를 품어냈다. 따스한 햇살이 꽃잎을 어루만지듯 내려앉을 때, 아내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웃음소리가 바람에 묻혀 날아갈 때, 작은 행복이 삶을 얼마나 따뜻하게 물들이는지 깨달았다. 밤하늘의 별은 오랜 연인의 떨림을 품은 듯 설렘을 안겨주었고 별빛은 아내의 웃음을 떠올리게 했다. 어느새 별빛이 암의 어두운 그림자를 덮어주며 우리를 따뜻하게 감쌌다.
햇살이 가득한 날, 숲길을 걸으며 마음을 비웠다. 나무 그림자는 발걸음마다 움직였고 부드러운 바람은 잎 사이를 지나며 속삭였다. 도시에서의 소음과 분주함은 점차 희미해졌다. 자연 속에서 작은 것들이 기적처럼 다가와 용기를 불어넣었다.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내면의 소란은 잦아들고 고요한 평온이 깊이 스며들었다. 손을 맞잡고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모든 순간을 간직하려 애썼다. 자연이 전해준 평온함은 마음을 더욱 깊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산을 누비며 약초를 채집하고 난초를 찾는 일은 귀촌 생활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어느 날, 가파른 비탈길에서 미끄러져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건너편에서 지켜보던 아내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두려움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행히 나무 사이에 몸이 멈춰 서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수직 절벽 아래로 떨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이 지나자, 안도감이 몰려왔다. 꽉 낀 몸을 실랑이 끝에 겨우 빠져나오자, 아내는 큰 웃음을 터뜨렸다. 화사한 웃음소리야말로 마치 생명수를 마신 듯 청명하게 울려 퍼졌다. 웃음은 암을 이겨내는 치유의 힘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강하게 밀려왔다.
장마가 지나고 개천의 물이 빠지면 수초 더미에 갇혀 꼬리를 흔들며 퍼덕이는 잉어 떼가 보였다. 맨몸으로 물에 뛰어들어 두 손을 휘저으며 잉어를 잡을 때, 시간의 흐름조차 잊었다. 이웃들과 나누는 따스한 대화와 마을의 소박한 축제들은 귀촌 생활의 큰 축복이었다.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도시에서 느낄 수 없었던 인간미와 온정을 새롭게 깨닫게 했다. 신뢰는 쌓였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은 매 순간 풍요로웠다.
하지만 깊은 평온 속에서도 가끔 현실이 잠든 나무들 사이로 속삭이듯 모습을 드러냈다. 고요한 숲길을 걸을 때마다, 도시에서 남겨두고 온 걱정거리들이 잠시 지워지는가 싶었으나 이내 현실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곤 했다. 안락한 일상에 스며들어 있던 작은 염려와 불안이 어느 순간 불쑥 나타나 긴장을 고조시키며 우리 앞에 놓인 숙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일깨웠다.
평화로운 일상에서도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토착민끼리 농사와 공동 사업에 관한 의견 차이가 생기고, 갈등은 마을을 가르며 분열을 초래했다. 정치적 분열처럼, 편을 가르라는 현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아내의 건강이 최우선이었기에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외로운 방랑자의 길을 택했다. 이 시기는 외로움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연대의 가치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텃밭을 가꾸는 일상은 육체적인 수고를 넘어 내면의 성찰로 이어졌다. 넓은 밭에 계절마다 채소를 심었고, 아내의 건강을 위해 무농약 농법을 고집했다. 잡초들은 끊임없이 돋아났고 뽑고 돌아서면 다시 머리를 내미는 잡초 속에서 허리를 펴기 어려웠다.
밭을 가는 농기구가 없었기에 삽으로 흙을 일구며 흙의 냄새를 맡을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잊힌 감각들이 되살아났다. 군대를 다녀온 이들이 얼마나 삽질을 잘했으면 ‘삽질하고 있네’라는 말이 떠올랐다. 삽질이 서툴렀던 나는 군대를 다녀왔다면 익숙한 삽질이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스쳤다. 삽질에 미숙한 탓에 손목이 아파 치료를 받으며 보호대를 차고 다니는 날이 잦았다. 이러한 과정은 자연의 순수함을 손끝으로 느끼며 마음의 수양으로 이어지는 경험을 했다. 흙을 만지며 느낀 평화는 단순한 노동을 넘어 삶의 본질을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다.
계절이 변해가며 자연 속에서 건강을 되찾고 있었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날이면 숲길을 걸으며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바람의 결을 느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마음을 어루만졌고 걸음을 멈추고 깊은숨을 내쉬며 바라보는 광경 속에 작은 기쁨이 찾아왔다.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에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이 순간만큼은 병마가 무엇인지 잊은 채, 오로지 생명의 신비와 기쁨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며 아내의 얼굴에 조금씩 붉은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밝게 웃어주는 모습은 여전히 낯설면서도 내 마음을 안도하게 했다. 매일 눈앞에 펼쳐지는 평화로운 일상,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소소한 습관들은 도시에서 잃었던 내면의 공허함을 천천히 메워 주었다. 그렇게 차분히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삶의 진정한 풍요를 찾아가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삶은 단순히 도시를 떠난 귀촌이 아니었다. 잃어버린 시간과 의미를 되찾는 여정이었다. 암을 이겨내기 위한 작은 희망들이 쌓여 오늘을 밝히고 그 여정 속에서 사랑과 의지가 만들어낸 기적들이 우리를 내일로 이끌었다. 삶은 더 이상 나은 내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존재하며 감사와 희망 속에서 나아가는 끝없는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