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에는 사람의 인생사가 반영되지 않는다. 그렇게 복학의 시기가 찾아왔다. 4학년 1학기, 어쩌면 가장 바쁘고 하고 싶은 일이 명확해질 시점에 나는 방황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단지 또 한 번 어떻게 살아야 될지에 대한 고민만 강요 받았다. 나 자신에게는 의미 없는 채찍질만 가해졌다.
더 이상 공부하는 것에 신물이 났다. 기업분석이고 경제분석이며 다 때려 치웠다. 이제는 페이지 속 숫자들과 친해지는 것이 생계에 도움 되는 활동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냥 나는 몇 년 동안 헛짓거리만 해 온 아이였고 괜찮은 인간관계, 변변찮은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내가 세상에서 제일 경멸하는) '찌질한' 무언가로만 남았다. 다시 시작할 힘도, 동기도, 그 무엇도 없었다. 어디에 취업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무슨 꿈을 꾸어야 하는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놔두었다.
한 번은 연애가 정말 너무 하고 싶어 주변에 여자가 많은 친구를 자취방에 매일 초대했다. 그를 통해 아무 여자나 소개시켜 달라고 하면서 헛헛한 외로움을 달래보려 노력했다. 끌리지도 않는 사람에게 연락처를 요청하는 가하면 썸을 타다 나중에 남자 친구가 있다는 말로 내 뒤통수를 후려 갈 긴 더 찐따 같은 경험도 얻어맞았다. 그 땐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부모님 문제로 가끔씩 설움이 몰려오는 것도 짜증나는데 내 진로마저 망쳐버렸다는 생각에 그냥 다 놔버리고 싶었다. 누구 하나 붙잡고 '제발 내 이야기 좀 들어줘'라고 넋두리를 길게 늘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그냥 다 나 스스로 감정이 소비되도록 질질 짜는 방법이 전부였다.
그런데 웃긴 건 비어지는 출금 내역 때문에 국가장학금은 사수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알바와 수업은 꼬박 꼬박 다니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알바는 돈이라도 주어 버틸만 했지만 시험은 정상적인 멘탈로는 치를 수가 없어서 학기 내내 참 많은 심장이 쫄렸던 기억이 난다. 다니는 동안 3.0의 성적을 넘냐 안 넘느냐로 느꼈던 '주옥'같은 '쫄림'이 지금은 많이 아련해졌다.
이 시절 기억에 남는 드라마가 있다면 단연코 '미생'이다. 미생은 힘든 내 삶에 거의 구세주로 다가왔다. 어쩌다 알게 된 이 드라마에서 나는 정말 흠뻑 빠지며 '장그래'의 삶에 나를 완전히 대입시켰다. 다른 상황, 다른 배경이었지만 바둑을 내치고 무역회사(나도 무역학과라)에 입사한 그의 모습과 좋아했던 꿈을 포기하고 다시 진로를 찾아 나서야 하는 내 사정에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아직 미생도 아닌 학생의 신분이다. 조금 더 시간을 가지며 천천히 생각하자 대익아."
학기가 마무리 되어갈 무렵, 나는 삶의 권역을 넓히기로 마음 먹었다. 대전이 아닌 서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기왕 다시 해보는 것이라면 재미있는 것을 찾고 싶었고 삶의 질이 무너져도 좋으니 내가 미칠 수 있는 것을 찾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더 넓은 반경으로 나가야 하는 법. 나는 마지막 4학년 2학기를 최후의 보루로 삼아 한 번 더 휴학을 신청했다. 그리고는 6개월의 시간 동안 나에게 자유를 선물해 주기로 했다. 그냥 한 번 마음껏 뛰어보며 해보고 싶은 것을 찾아보라는 취지에서였다. 정든 대전생활. 그렇게 대전에서의 삶은 2015년 2월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PS
서울에 갈 때 그냥 무일푼으로 갈 수는 없으니 다시 한 번 빡씨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이번에도 역시 답은 노가다였다. 그렇게 나는 정말이지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더 노가다 문을 두드렸다. 14편, '살면서 가장 위험했던 일'의 배경은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