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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에 남겨진 바디 프로필

by Aroana

보험설계사를 그만두고 다시 또 자유가 찾아왔다. 그러나 이번 자유행 열차는 (전과는 달리)내가 어디서 내릴지 선택할 수 없는 지점에서 올라 타버린 셈이 되었다. 터널의 한복판 속에서, 이제는 역명도 모르는 곳 앞에 나는 또 내려야 할 처지가 돼버렸다.


기필코 세일즈로 성공해보겠다는 다짐 속에 호기롭게 신청한 4학년 2학기는 3학점만 들으면 졸업이라는 훌륭한 조건 속에서 시작 되었다. 그러나 현실과는 달리 3개월도 채 못 버틴 보험 영업은 내 잔고를 바닥으로 만들고는 멘탈을 갈기 갈기 부숴나 버렸다. 이제 곧 졸업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취업을 해야 하는 부담은 스스로에게 '서두름'을 강요했다. 자소서를 녹이기엔 무엇하나 충분히 않은 경험에서 변해버린 취준생으로의 삶은 내 일상을 압박해 갔다.


백수가 되니 또 다시 일거리를 전전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인생이라 생각했다. 일할 의욕도 나지 않던 멘털을 억지로 멱살 잡고는 일주일에 한 두번 이삿짐 알바를 했다. 그렇게 최소한의 생활비만 확보해 놓고 나머지는 서점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나보다 더 힘들고 우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조금씩 기운을 내려 노력했다. 집에 가서는 먼 미래를 고민하기 보다 당장 현재의 모습에 어떤 변화를 줄지 고민했다. 이미 엄청나게 불어난 살은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을 자아내는 중이었고 그 결과로 자꾸 술을 더 찾게 되었다. 당장 이 연결고리를 끊고 싶었다. 돈이 없어 옷을 사지 못해 맞지도 않는 옷을 억지로 우겨 넣는 모습에 치가 떨렸다. 운동을 생각하자니 한숨부터 흘러 나왔고 매번 틀을 깨지 못해 주저 않는 나날이 늘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집 앞 관리소 지하에 아주 허름하게 차려진 헬스장(샤워실도 없는)이 내 눈을 사로 잡았다. 그 옆에는 한 달에 3만원이라는 전단지가 붙어 있었고 나는 별 다른 고민 없이 가입을 하고는 첫 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그 곳 러닝머신에서 무려 한 시간을 뛰기에 이르렀다.


첫 러닝 후 몸무게를 재고는 집에 와 샤워를 하고 과일 한 조각을 먹으며 그 날은 그렇게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밝았다. 나는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키며 집에서 5분도 걸리지 않는 헬스장에 가서 또 다시 60분의 러닝을 한 번도 안 쉬고 지속했다. 그리고는 다시 체중 확인, 하루 사이 3kg 이상 빠진 체중을 보며 뭔가 엄청난 희열감을 느꼈다.


"이거다! 내가 찾던 게 바로 이런 거였어!"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다이어트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날부터 모든 최우선 목표는 체중감량으로 바뀌어 버렸다. 취업이고 나발이고 현실적으로 내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갖는 유일한 희망은 몸 관리였다. 나는 우선 몸을 가꾼 후 거기서 얻은 기분 좋은 에너지를 발판 삼아 다시 취업 시장에 도전하기로 했다. 지금껏 내 안을 괴롭히던 고민이 사라지자 그 때 부터 미친 듯이 몸 관리에 목을 매었다. 하루 1시간은 기본이었고 시간을 늘려 최대 1시간 30분동안 쉬지 않고 러닝을 하는 등 그간 쌓여왔던 몸의 찌꺼기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밥은 무조건 한 그릇 이상 먹지 않으며 시간이 지나자 이것도 반 그릇으로 줄이는 등 다소 극단적인 형태의 식단관리가 이어졌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말라가는 것을 체험하며 한 달 반 사이에 무려 10kg 이상 감량에 성공했다. 술은 끊을 수 없어 일주일에 두 번은 마시는 날로 정했다. 대신 이것도 마신 후 다음 날에는 최대 3시간의 러닝을 하는 등 전날 먹은 칼로리를 모두 소진시키겠다는 마음으로 미친 듯이 달렸다. 여기에 조금씩윗몸 일으키기와 레그레이즈, 팔굽혀펴기 등 맨몸 위주의 근력운동을 추가하며 원하는 형태의 몸 만들기에 돌입했다. 그렇게 또 3개월의 시간이 흘러 나는 5kg 추가 감량을 달성하며 태어나서 가장 좋은 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오죽했으면 헬스장 관장님이 나보고 '王'자는 그만하면 충분하니 다른 운동을 하라고 권할 정도였다. 이 때 나는 복부에는 진심이었기에 인생 첫 빨래판 복근에 자존감마저 올라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그 놈의 '조금만 더'라는 욕심이 나를 발목잡는 바람에 가장 멋진 몸을 만들었음에도 이를 '바디 프로필'로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다. 돈이 없는 것도 있었지만 사진관에 가서 그냥 '몸 사진'만이라도 한 번 찍어보고 싶었는데 그럴 시점을 놓쳤다. 그나마 다행인 건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로 담은 것엔 성공했다. 운동 후 그냥 한 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찍어보고자 했던 건데 그 사진이 내 인생에서 '레전드 샷'이 될 줄이랴... 이후로도 다이어트를 몇 번 시도해봤는데 이 때의 시절을 털 끝만치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참 야속한 세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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