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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배송 알바를 하며

by Aroana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취준생활이 내 생계를 압박해 갔다. 엄마가 이 무렵 할머니로부터 독립해 서울에서 첫 집을 장만하는 기적 같은 성과를 보인 것이다. 누나와 나는 엄마의 실행력에 경외감을 느낄 새도 없이 눈치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에 뛸듯이 기뻤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우리 집'에서 새 출발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고작 며칠 나가는 일용직으로는 생활비에 보탬이 되는 것이 불가능했다. 대출 이자, 관리비, 식료품비, 그 어느 것에도 도움을 못 주는 형편이 참 야속했다. 그렇다고 면접을 포기하면서까지 고정 알바를 하기에도 어려웠다. 다이어트 덕분에 몸과 마음은 건강하게 돌아왔지만 가족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은 여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척 형님으로부터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대익아, 형 따라 택배 배송 좀 같이 해볼래? 하다가 중간에 면접 잡히면 미리 얘기하고 가도 돼. 형 5~6시간만 좀 도와줘"


하루 종일 자소서만 쓰지 않았던 나는 형님의 제안이 반갑게 들렸다. 눈치 보지 않고 취업을 준비할 수 있었고 한 달 생활비로는 (그나마)넉넉한 액수의 급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운동한다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응했다. 다음날, 바로 형님이 일하는 택배 터미널 현장에 출근했다.


종로 5가 구역을 담당하는 형님은 배송 기사 경력이 어림잡아 10년 정도 된 베테랑이다. 배송 건수도 이미 가장 많았고 집하(배송이 끝나고 거래처 물건을 수거해가는 작업) 물량 역시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업계의 고소득자였던 것이다. 단지 주소만 보고 지리를 꿰뚫는 형님의 비범한 능력에 감탄해가며 시키는 대로 물건을 배송했다. 잠깐 이동하면 배송하고, 또 잠깐 이동하면 배송하는 이 업은 몸을 정말 부지런히 놀려야만 했다. 그러나 의외로 나는 그런 노동이 몸에 맞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시키는 대로 물건만 갖다 주면 되기 때문이다. 4~5층도 운동 한답 시고 부지런히 달리고 무거운 물건은 어깨운동 한다 생각하며 받아들이니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태양 볕에 바깥바람을 맞으면서 일하니까 뭔가 기분마저 상쾌해진 느낌이었다.


나는 배송 보조를 단순히 돈벌이로만 받아들이기보단 또 하나의 경험이라 생각했다. 골목 골목을 헤집으며 여기저기 물건을 나르는 게 뭐랄까 일종의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에 가서 물건을 건네주는 등, 아주 허름한 곳에도 가봤다가 또 아주 으리으리한 건물에 가서 물건을 건네주는 행위가 뇌에서 어떤 자극을 느끼게 해주었다. 배송 알바를 하면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구석 구석 살펴 볼 수 있었고 어쩌면 그곳에서 사회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허름한 자영업자부터 초고층 빌딩의 대기업까지, 도금 작업실, 대부업체, 섬유 공장 등 가보는 것 자체가 신기한 경험들이 나에게는 연속적으로 다가왔다.


일을 하면서 많이 즐겨 들었던 노래로는 도끼의 111%가 있다. 나이만 따지면 동갑인 이 래퍼의 가사 속에는 늘 '나는 잘 났지!'라는 자신감 넘치는 스웩이 넘처 흘렀다. 반면 이 삶의 반대편 현장에선 가진 건 쥐뿔도 없는 한 청년이 물건의 주소만 쳐다보며 여기저기 길을 헤맸다. 나도 언젠간 꼭 성공하고 말거야라는 한을 품은 다짐은 이 노래의 가사를 통째로 외워버리는 것으로 울적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가사 中


스물하나에는 1억

스물둘엔 거의 2억

그래 스물셋엔 오억 찍고

다섯에는 10억


그리고 그 달 내가 받은 급여는 65만 원 언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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