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외할머니에게 했던 기도는

by Aroana

외할머니는 우리 가족에게 참 많은 선물을 안겨주신 분이다. 먼저 둘재, 셋째 누나가 서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낼 때 할머니의 집은 든든한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아버지와 이혼 후 첫째 누나집에서 갈등을 겪다 나온 엄마한테서도 외할머니댁은 유일한 안식처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서울타령만 외쳤던 나마저 거둬들였을 만큼 할머니의 품은 넓었다.


할머니 집에서 신세를 졌을 때 나는 보험설계사로 사회의 쓴맛을 제대로 맛보는 중이었다. 할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내가 꽤 답답했을 것이다. 한창 사회물을 먹어야 할 시기에 갑자기 호주로 떠난다고 하질 않나, 돌아와서도 어엿한 회사원이 아닌 서비스직만 전전해하는 모습만 보여드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있었다. 의식이 있으셨을 때 내가 쓴 책을 보여드린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노환으로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는 기어코 손주의 성취물을 감상하시고는 눈을 감으셨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나는 외가족 손주 중에서는 유일하게 삼일장에 모두 참석해 가시는 길을 배웅해 드렸다. 울어야 할 타이밍에서는 누구보다 서럽게 울었고 분향소에서는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화장터에서 할머니의 영혼이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는 당신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을 함께 태우기도 했다.


엄마는 집 근처 산책로의 어딘가에 외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흔적을 기리는 공간을 마련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엄마와 함께 할머니에게 들려드릴 기쁜 소식을 가지고 첫 인사를 했다. 자식에 이어 손주마저 부동산을 계약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할머니가 들으시면 좋아할 만한 직업인 기자로 나는 나를 소개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최근의 근황을 할머니에게 들려드렸다.


표면적으로는 안부 인사였지만 속으로는 할머니로부터 응원과 에너지를 얻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사실 그 무렵 나는 이미 기자란 직업에 꽤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또 난생 처음 억 단위 대출을 받을 것에 대한 부담감도 느끼고 있었다. 대출이 나오는 3개월의 시간까지 이 직업을 유지해야 하는데 과연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나는 기자로서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할머니에게 호소 아닌 호소를 했다. 이승에 계신 할머니에게 안부를 묻기 보단 내가 처한 힘든 점만 가득 늘어놓으며 의지 아닌 의지를 했다.


기도를 마치고 엄마와 나는 산책로에서 내려와 모처럼 외식을 하며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엄마는 첫째 누나 아기를 봐주기 위해 집을 나섰고 나는 한동안 다시 혼자 살게 되었다. 그리고 2주쯤 지났을 때였었나 보다. 힘들고 지친 나날들이 계속되었고 그러던 와중 주말을 맞게 되었다. 시간은 자정을 거의 가리키고 있었다. 이미 혼자서 술 한잔 걸친 나는 그 어두컴컴한 밤에 속마음이라도 터 놓고 싶어 기어코 할머니의 흔적을 기린 산책로를 찾았다. 그리고는 일이 너무 힘들다며 울면서 하소연을 시작했다. 제발 3개월만 버틸 힘을 달라고, 대출을 받을 때 까지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일을 그만둘 수 없다며 조금만 힘을 보태달라고 애원했다. 가엾은 할머니는 술에 취한 손주의 꼬장 마저 다정하게 들어주셨다. 주변에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분명 미친놈이라고 경찰에 신고했을 장면이다. 아무튼 그 때는 정말 애걸복걸하며 나는 이승에 계신 할머니한테서야만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외로운 상태였다. 가족에게는 말 못할 사정이 있었기에 내색할 수 없었다. 당시의 내 괴로움을 아는 사람은 돌아가신 할머니만이 유일했다.


내 집 마련의 비화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숨어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마냥 웃어넘겼지만 이 때 나는 스트레스성 폭식으로 인한 체중 증가와 머리가 빠질 만큼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놀라운 건 이 기도가 분명 먹혔다는 점이다. 이후 나는 2~3달은 버틸 취재력을 가질 수 있었고 정말이지 기적과 같은 사건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그럴싸한 명분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대출금 역시 원하는 조건으로 무사히 받을 수 있었다. 이게 다 모두 외할머니 덕분이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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