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이성에게 처음으로 고백했던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사실 내 찌질한 흑역사인데 이렇게 공개하는 것도 참 웃긴 것 같다.
지연(가명)이와 나는 같은 과 동기였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내 기숙사 친구의 친구 그룹에 속하는 무리였고 당시 나는 어딘가에도 속하지 않고 적당히 모든 친구들과 어울렸다. 기숙사 친구들과도 제법 술자리를 갖고 여기저기 무리의 친구들과도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레 지연이와도 안면을 트는 사이가 되었다. 지연이는 귀여운 외모에 술을 좋아했으며 조금은 허둥대는 다소 엉뚱한 성격을 지녔다. 나는 그런 지연이를 처음에는 마냥 좋은 친구로 여겼다. 그러나 쾌활한 성격에서 보이는 일부 행동들로 인해 나는 그만 오해를 해버리고 마는 모습을 보였다. 지연이의 빈말과 당시의 표정에서 나는 그녀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한 것이다. 눈치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 나는 온갖 상상을 해가며 그 때 부터 지연이의 모습이 점점 눈에 들어왔다. 조금씩 메시지도 주고 받고(당시는 카톡이 보편화되기 전이었다) 안부를 물어가며 지연이의 일상에 나를 주입시키려 노력했다. 빈번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틈틈이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기숙사에 지내는 친구들로 인해 그들은 서로가 술 약속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나를 부르곤 했다. 그 때 까지 의도적인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던 나는 자연스레 지연이와 마주치며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리숙하고 완전 숙맥이었던 나는 지연이의 장난어린 호감들을 계속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나아가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지연이를 더 좋아하고 있다는 감정까지 느끼게 되었다(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이 이랬으니 할 말은 없는데, 훗날 다시 기억해보면 사실 애초에 나에게 호감이 있었는지부터 의문이 들긴 하다..).
지연이의 장난어린 관심을 '썸'이라고 느꼈던 나는 적당히 안부도 주고 받았겠다, 나에게 관심도 있는 것 같겠다 싶은 생각에 좀 더 적극적인 의사표현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건을 터뜨렸다.
때는 학과 모임을 마치고 뒷풀이가 진행되는 중 이었다. 지연이는 1차 까지만 마시다 집에 갔고 그 날 나는 갑자기 무슨 (미친) 생각이 들었는지 2차에서 빠져나와 지연이에게 고백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밤 10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나는 지연이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냐고 물어봤고 집이라고 하길래 미안하지만 잠깐 나와 줄 수 있냐고 부탁, 아니 강요를 했다. 그 때 지연이가 무엇 때문이냐고 물어봤다. 나는 다짜고짜 할 말이 있다며 가서 하겠다는 말을 하고는 집주소를 물어 일을 저지르기 직전의 단계에 다다랐다.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나지 않았다. 그저 TV에서 보던 대로 꽃집에 들려(다이소 였나?) 아무거나 그럴싸한 생화와 함께 파리바게트에서 수준에 맞는 적당한 케이크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택시를 타고 그녀가 살고 있는 집 앞 놀이터에 도착했다.
심호흡을 하면서 기다리는 동안 그녀가 나와 주었다. 나는 흥분과 떨리는 마음을 애써 움켜잡으며 그녀에게 속마음을 고백했다.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다고,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그냥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며 담담하게 내가 지닌 감정을 전달했다. 결과는?... 당연히 거절이었다. 다만 그녀는 또박 또박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면서 고맙지만 친구로 지내고 싶다며 거절의사를 밝혔다. 나는 마치 예상이나 한 듯 더 이상의 질문은 캐지 않았다(사실은 그 이상의 전개까지는 계획하지 않았다. 그 만큼 감정만 앞섰다는 뜻이다) 다만 꽃과 케이크를 샀으니 마음 대신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는 이 모든 사태?를 종결짓는 의무로 '악수'를 건네며 내 첫 번째 고백은 병 맛 같이 짠하게 마무리 되었다.
추가로 덧붙이자면 고백이 끝나고 나는 기숙사 근처에 있는 코인 노래방에 가서 미처 못다한 감정의 한을 풀었다. 이 때 내가 한참 들었던 노래가 김동률의 '취중진담' 이었는데 거기서 그 노래를 몇 번이나 부르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까였으니 왠지 이렇게는 해줘야 마음이 풀릴 것 같아서였다. 누구한테 이런 사연을 밝힐 것인가.. 아마 그 때부터 나는 감정에 솔직한 아이가 되었던 것 같다.
신기한 건 다음날부터 지연이에 대한 호감이 완전히 사그라졌다. 정나미가 떨어졌다기 보단 그냥 친구처럼 대하는 데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딱히 어색한 감정도 없었고 부끄럽다는 생각을 가져보지도 않았다(사람 사이에 좋아하는 감정을 느낀다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단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더는 개인적인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정도? 애초에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가 아니었으니 그것 말고는 딱히 관계가 나쁘거나 좋거나 하는 게 없었다. 그렇게 지연이와 나와의 관계는 그 사건 이후로 끝을 맺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