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 입대를 하고 훈련병 시절을 거쳐 어느 덧 자대로 전입을 오게 되었다. 나는 운이 좋게 포병대대의 행정병이라는 보직을 가지게 되었다. 본부 계원이라는 타이틀, 정확히 말해 작전정보과에서 교육계원이었던 나는 내가 가진 보직에 꽤 많은 자긍심을 느꼈다. 대대의 정보와 동향을 수시로 파악이 가능하고 여름에는 에어컨을, 겨울에는 남방을 틀어주는 곳에서 근무를 할 수 있다는 이점이 내가 지닌 보직의 특징이다. 그러나 자대로 온 첫 날, 혹한기 훈련을 마친 선임을 보고 웃으면서 인사를 한 날로부터 시작해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털려가며 군대의 잔혹함을 맛보게 되었다.
훈련병과 전입의 큰 차이점을 구분 짓자면, 이 당시 훈련병은 전화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한 반면 자대로 전입한 이후부터는 여가 시간에 전화사용이 가능했다. 나는 틈만 나면 친구와 누나에게, 가끔은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군 생활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처음에는 좋은 보직을 가진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끔은 외부 작업이 면제된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다 날이 갈수록 갈굼이 심해지고 마음고생한 날들이 점차 늘어 갔다. 생활관에서 목청이 찢겨지는 고함을 듣기도 해봤고 앉은 채로 의자에 차이면서 '폐급'이라는 소리도 수차례 들었다. 행정병은 작업이 상대적으로 덜한 대신 내부 기강이 심하다는 소리에 차라리 포병이나 작업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에 선임들은 진지하게 보직을 고민해보라며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등의 자존심 섞인 갈굼은 하루에도 수 십번씩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어쩌다 취사 지원이라도 가게 되는 날에는 해방되는 느낌을 받았다. 적어도 그 날 만큼은 생활관 선임들과 부딪히지 않을 수 있어서다. 취사병 선임들은 다른 생활관인 나를 악의 없이 잘 대해 주었고 나는 종종 취사병으로 보직 이동을 하고 싶다는 속내를 가족에게 털어 놨다.
갈굼을 먹을 때 마다 가족에게 이야기하는 횟수가 빈번해졌다. 군 생활 초기임에도 갈굼의 정도가 너무 심해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나는 결국 누나에게 내가 지닌 보직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며 보직 이동을 하고 싶다고 수차례 의사를 드러냈다.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내 모습에 낫빛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수화기 넘어 목소리에는 언제 울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서러움이 목 안에 가득 쌓여만 갔다.
그럼에도 보직 이동을 끝까지 망설였던 이유는 단순했다. 여기서는 보직 이동을 신청한 순간 '폐급'이라는 낙인이 대대에 박제 되어 제대로 된 선임 대우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버티지 못하는 것'을 가장 드러내 보이면 안 되는 곳이 이 곳 군대 문화다. 나는 지독하리 만치 독한 갈굼에도 어떻게든 견뎌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생활관의 선임과 초소 근무를 할 때 였다. 이미 재미없는 초소원으로 소문이 나있기도 했던 나는 여느 때처럼 말 한마디 하지 않으며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선임은 그런 나에게 갑자기 장갑을 돌돌 말아 캐치볼을 하자고 제안했다. 공을 던지면서 선임은 나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요즘도 가족에게 안부전화는 하고 있냐?"
"네 그렇습니다."
"가족에게 절대 힘든 내색 보이지 마라. 부모님이 너를 군대에 보냈는데 그런 네가 부모님에게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는 행동이야. 그러니까 절대 이야기 하지마"
"네, 알겠습니다."
선임은 내가 생활관에서 정신 없이 털려가는 모습을 몇 번 목격한 것 같다. 안쓰러워서 하는 조언인지, 아니면 그냥 흔하디 흔한 군대식 조언인지 딱히 분간이 되진 않았다. 후임으로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선임의 말에 무조건 수긍을 했다. 그러나 당시 솔직한 심정은 따로 있었다. 그 때 나는 변명을 해서라도
"제가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안부를 전하는 것 보단 차라리 힘든 티를 보이면서 마음의 진심을 전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임이 그 말을 했던 저의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내 진심이 부모님에게 닿아 걱정시키는 것 보단 차라리 내 선에서 끊고 부모님을 안심 시켜주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누군가 한 명이 안심이 되어야 한다면, 그리고 그게 어차피 내가 될 수 없다면, 다른 한 명은 가족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다 걱정을 하는 것 보단 한 명이라도 버티고 서서 다른 사람이 본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훗날 이 마음가짐은 내가 생각한 '책임감'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후 나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 때 마다 점차 적응이 되고 갈굼의 횟수가 줄고 있다고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생활관에서 포대장과 면담을 하고 보직 이동을 하기 직전까지 갔음에도 선임에게 칭찬을 받았다며 거짓말을 하는 등 잘 지낸다고 애써 둘러댔다. 전화를 끊고 다시 갈굼을 받으로 가며 눈물이 난 적도 있었지만 끝내 가족에게 만큼은 힘든 티를 내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저 흔하고 사소했을 조언이 당시 나에게는 꽤 큰 울림이 되었다. '힘들다'는 것을 말하는 게 얼마나 큰 무게감을 지닌 말인지, 힘듦을 말하기 까지 나는 얼마만큼 인내를 감내 했는지 등을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해 주게 만드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