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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맑음 Aug 21. 2024

[로맨스소설] X의 자서전 5화

5화


한새벽은 정갈하게 차려입은 갈색 슈트를 털어냈다. 아침에 세팅한 머리카락이 자꾸만 이마로 흘러내려서 손으로 쓸어올렸다. 지방의 집 한 채 값은 될 손목시계를 무심히 내려다보면서 창밖을 응시헀다.


레스토랑의 조명이 차가운 한새벽의 얼굴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건물의 꼭대기 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은 창밖으로 한강의 대교가 보였다. 엔진음은 들리지 않았지만, 목적지로 향하는 자동차의 헤드 라이터가 빛을 뿜었다.


“…기다리는 거 진짜 싫은데.”


한새벽이 중얼거리며 다시금 손목 시계를 내려다봤다. 이미 폐점 시간에 가까운 모양인지 제 눈치를 보는 종업원들이 보였음에도 한새벽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타닥! 타다닥!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달려오는 걸음이 소리로 들렸다.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헝클어진 머리를 손에 쥐고 숨을 헐떡이면서 이쪽을 노려보는 연수연이 보였다. 한새벽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 입매를 굳혔다.


“하, 하아…저기요, 지금 시간이 몇시인지 아세요?”


서버의 안내를 받아서 자리로 다가온 연수연이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새벽은 천천히 열을 센 후,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연수연이 있었다. 화장도 하지 않은 맨얼굴의 여자는 고급 레스토랑엔 어울리지 않는 점퍼 차림으로 투덜거렸다.


“계약에 이런 것도 있어요? 그냥 문자로 통보하면 아무 때나 주인 기다리던 개처럼 달려오기?”


빈정거리는 어투가 익숙해 보였다. 늘 웃고 있던 십 대의 연수연이 떠올랐다. 그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질 날이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시니컬한 모습도 잘 어울렸다.


연수연이 화가 난 이유는 뻔했다. 한새벽은 자서전 대필을 맡긴 후 연신 제 식으로 수줍어했다. 보고 싶은데 불러내지도 못하던 수줍은 남자는 강수를 뒀다.


[저녁 9시. 에끌라 드 사피르.]


구구절절하게 연서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지만 손가락까지 덜덜 떨면서 써낸 문자는 단출했다. 그리고 지금 시간은 10시 30분이 조금 지났다. 문자를 보낸 시간이 저녁 7시였으니 충분히 볼 것이라 생각했는데 연수연은 뒤늦게 문자를 확인하고 뛰어온 모습이었다.


“시간 내기 힘드시면 답장만 보내셨으면 됩니다. 다음에 보자고요.”


“아, 네~ 그러면 됐겠네요. 거절하면 되는데 제가 너무 황송해서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진짜 미안한 것이 아니라는 건 굳이 말투가 아니라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여인이 된 소녀는 제가 알던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예쁘장한 소녀는 늘 자신감이 넘쳤었다.


값비싼 레스토랑이 부담스러운 듯 자꾸만 눈치를 보며 가격표도 안 붙어있는 메뉴판을 초조하게 응시하는 여자가 낯설었다. 한새벽은 과거에 묻지 않았던 그녀의 사연이 궁금했다.


“자서전을 쓰려면 저에 대해서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시간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의원님에 대한 건 이미 비서를 통해서 전달받았어요. 초안을 작성 중이에요.”


연수연이 낡은 가방을 뒤져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한새벽의 개인 연혁과 정책 등이 어지럽게 펼쳐졌다. 이번엔 한새벽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새벽이 손을 뻗어서 뭉치를 덮어버리고 연수연을 마주 보았다.


‘…예전에도 손이 컸지.’


연수연은 한새벽의 손을 보고 있었다. 연수연이 계속 학교에 다녔다면 그들은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대학생 시절, 휩쓸리듯 연애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서로에게 서서히 빠져들었을지도 모른다.


한새벽을 좋아해서 고백에 응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쁘지 않다곤 생각했지만, 그보단 마음 붙일 곳이 없었던 22살의 연수연은 그를 도피처로 삼았다. 그래도 그 커다란 손과 손을 마주 잡을 때 안심이 되었다.


“이런 것 말고요. 저에 대해서 쓰셔야죠. 제 일이 아니라요.”


정치인의 자서전이 보통 그러하지 않은가. 그것은 길게 포장된 선전용 전단이었고 유권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이다. 후원금을 모집하기 위한 핑계로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사실 연수연은 최선을 다해서 그의 자서전을 대필할 생각이 없었다.


저자의 이름도 남기지 못할 서글픈 그녀의 작품.


생활비가 급하지 않았다면 수락하지 않았을 일이다. 그러나 한새벽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는 서버를 불러서 코스 요리와 값비싼 와인을 주문했다.


‘고작 인터뷰나 하자고 이런 비싼 레스토랑에서 식사한다니.’


연수연은 쭈뼛거리며 주변을 힐끔거렸다.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의 식사비는 그녀의 한 달 생활비를 웃돌 것 같았다.


“…그래서, 제가 의원님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고요?”


한새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 새끼는 턱선도 예술이구나. 연수연이 짧게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뒤져서 필기 용품을 꺼냈다. 두꺼운 스프링노트와 볼펜이었다.


“아날로그를 좋아하나 봐요. 요즘은 다 전자기기를 쓰지 않나요?”


연수연은 말없이 입꼬리만 들어 올렸다. 웃고 있지 않은 것은 무심한 눈만 보아도 알 것이다. 그 표정은 연수연 식의 사회적 가면이었다. 차마 그럴 돈이 있으면 한 끼 식사를 하고 싶다고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원님의 이야기를 하시면 제가 받아적을게요. 생각나시는 대로 이야기해주시면 그중에 이야기가 될만한 내용을 뽑아볼게요.”


“…언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한새벽의 시선은 노트에 시선을 고정하고 손을 풀고 있는 연수연을 훑어내렸다. 그녀의 체구에 맞지 않은 커다란 옷에 가려진 가녀린 체구가 신경이 쓰였다. 덜 마른 머리를 연신 쓸어올리는 마른 손. 침묵이 길어지자 의아하게 눈을 들어 올리는 연수연 탓에 한새벽은 관자놀이를 검지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무심하게 말했다.


“고등학생 때부터겠네요.”


“뭐가요?”


“내 삶이 시작된 거요.”


‘그것참 남들보다 늦네요.’


연수연은 근질거리는 입을 단속하면서 노트에 그의 말을 받아적었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리더십에 대한 것일까. 그는 학창 시절부터 전교를 대표하는 학생회의 임원이었다.


“…그렇군요. 고등학교 때 특별한 활동을 하셨어요? 학생회 같은?”


먹은 것이 없음에도 입에서 쓴맛이 나는 것 같았다. 연수연은 제 앞에 놓아진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한새벽의 인생을 이야기하면서 속이 쓰린 까닭은 연수연의 인생도 그와 같은 궤도로 흘렀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요.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뭔데?’


연수연은 삐딱한 시선으로 한새벽을 흘겨보면서 매끄럽게 나오지 않는 볼펜을 빈 종이에 탕탕 두드렸다. 마침 코스 요리의 시작인 아뮈즈 부슈가 나왔다.


“상큼한 라임으로 간을 맞춘 신선한 연어입니다. 타르타르, 딜과 함께 곁들입니다.”


서버의 친절은 돈으로 산 것처럼 정중했다. 연수연은 배가 고팠기에 펜을 내려두고 포크를 쥔 채로 그 뒤에 나온 에피타이저, 그리고 생선요리까지 연거푸 삼켰다.


에피타이저는 고소한 호박 수프에 향긋한 블랙 트러플 오일을 뿌린 요리였으며, 생선은 바싹하게 구운 농어 필레에 셀러리 뿌리 퓌레와 함께 제공되었다. 부드럽고 크리미한 버터 소스에 감탄하면서 불쾌하다고 생각했던 식사를 즐기고 있는 연수연을 보면서 한새벽은 몰래 웃었다.


“천천히 드십시오. 그러다 메인요리를 못 먹겠어요.”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연수연이 포크를 내려두고 다시 펜을 잡았다. 걸신들린 것처럼 음식을 먹어치운 것이 부끄러운지 홍조가 올라온 얼굴이 탐스러웠다.


“흐, 으흠. 하던 이야기 마저 하시죠. 고등학교 때 뭘 하셨는데요?”


“아, 그거요.”


이번엔 한새벽이 딴청이다. 괜히 냅킨으로 깨끗한 입가를 닦아내고 시계를 내려다보기도 하면서 침묵하던 한새벽은 메인요리가 나올 때쯤 입을 열었다.


“잘 익힌 오리 가슴살에 신선한 무화과와 레드 와인 소스를 곁들인 요리입니다. 오리의 육즙과 달콤한 무화과, 진한 왕인 소스가 어우러져 깊은 풍미를 줍니다.”


“첫사랑이요.”


“네?”


묵묵히 서빙하던 서버가 건조한 한새벽의 입에서 나온 첫사랑 타령에 놀란 것처럼 되묻다가 입을 다물고 사라졌다. 연수연도 황당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저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자서전 쓰는데 첫사랑 이야기는 왜 하세요?”


연수연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물었다. 한새벽, 그 또라이는 진지한 얼굴로 또 농담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번엔 속지 않으리.


“제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니까요. 사랑 말입니다. 그게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그거 어디에 나오는 대사예요?”


컨셉 이상하게 잡네. 연수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토해내면서 펜을 내려두었다. 헛소리에 반응하느니 오리 가슴살을 먹는 것이 생산적이다.


“왜요? 작가님은 첫사랑 없으세요?”


‘왜 고등학교를 중퇴했을까? 그리고 왜 대학은 2년이나 늦게 입학한 걸까.’


묻고 싶은 것은 차마 묻지도 못하고 한새벽은 그린 듯한 미소를 얼굴에 걸었다. 은근히 얼굴에 약한 연수연이 다시 사랑에 빠지길 기원하는 미소였다.


인터뷰를 가장한 데이트였다. 은은하게 흐르는 음악과 조명. 그리고 값비싼 요리와 와인. 연수연이 바라는 것이 차라리 물질적인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누구보다 빠르게 연수연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고등학교 안 나왔는데요.”


연수연이 불퉁하니 이야기했다. 한새벽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이력서에 고등학교는 중퇴로, 그리고 검정고시를 친 것으로 기록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한새벽은 그 여름방학이 끝나면 연수연의 친구가 될 생각이었다. 수줍음 따윈 개나 주고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 그러나 연수연은 그 여름을 마지막으로 학교를 떠났다.


한새벽의 순정은 주인을 잃고 오래도록 방황하였다.





요즘 밤에 잠을 잘 못자는데 늘 심심하네요

재밌게 보시는 분 있나욤? 댓글 좀 달아주세욤

늘 심심으로 필명을 바꿔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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