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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맑음 Aug 18. 2024

[로맨스소설] X의 자서전 4화

4화


연수연은 떠나가는 한새벽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의 남자아이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으니 아무리 미운 말을 하여도 마음이 쓰였다. 그의 새것이 분명한 하얀 운동화가 바닥에 끌리면서 발자국을 길게 늘어트렸다.


잠시 비가 그친 하늘은 변덕스러워 금방이라도 다시 비가 내릴 것 같았다. 한새벽의 두 손 어디에도 우산은 보이지 않았다. 연수연은 제 노란 장우산을 잠시 응시하다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결국 한새벽의 등을 향해 뛰었다.


한새벽은 타이어라도 매단 것처럼 느리게 걷고 있었는데 잠깐 뛰는 것만으로 금방 그에게 닿았다. 커다란 등을 툭 치자 놀라서 돌아보는 그를 보고 연수연은 밝게 웃었다.


“…심장 튀어나올 것 같네.”


한새벽은 작게 중얼거렸다. 연수연은 ‘놀라게 해서 미안해.’라고 이야기하려다가 고개를 털어냈다. 그리고 제 노란 우산을 펼치며 까치발을 들었다. 저보다 머리 두 개 이상 큰 한새벽에게 우산을 씌워주기 위해서였다.


“우산 없지? 왜 비를 맞고 다녀!”


한새벽은 말이 없었다. 왜인지 앞으로 맨 제 배낭을 꾹 쥔 한새벽은 꼭 슬로우모션을 건 것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몇 번이나 망설이던 손은 결국 우산 손잡이를 잡았다. 공격이라도 받는 것처럼 가방을 움켜쥐는 한새벽을 보면서 연수연은 웃었다.


“거기 우산 숨겨뒀어? 왜 자꾸 감춰?”


한새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새벽의 커다란 손에 들린 우산 손잡이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위로 솟아올랐다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한새벽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이 연수연은 샐쭉 웃으며 이야기했다.


“농담이야. 우산이 있으면 이미 썼겠지. 뭐가 좋아서 나랑 같이 쓰겠어? 그렇지?”


“…다, 당연하지. 나는 비가 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우산을 챙기지 않는 멍청이니까.”


연수연은 연신 재잘거렸다. 목소리까지 좋은 연수연의 옆에서 긴장해서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 싫었다. 한새벽은 연수연이랑 오래도록 같이 있고 싶었다. 연수연은 학교 앞의 버스정류장까지 한새벽을 데려다줄 모양이었다.


침묵이 어색한 모양인지 아니면 본래 쾌활한 성격인지 주제를 바꿔가면서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을 새겨들으며 한새벽은 눈을 굴렸다. 주제는 날씨에 이어서 티비의 드라마로 옮겨져 있었다.


“그래서! 우리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배우가 드라마에 새로 나오는 거야. 역시 남자는 이마를 덮은 것보다 깐 게 멋있다고 하시면서 말이야!”


“너는?”


긴장감에 마른침만 삼키던 한새벽의 말에 연수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묵한 한새벽이 그제야 말을 한 것은 반가운데 뜻이 모호했기 때문이다.


“내가 뭐?”


“너도 그 배우가 좋냐고.”


“아! 나도 엄마랑 남자 취향이 비슷한가 봐! 잘생긴 남자 좋지!”


“…또? 또 어떤 남자 좋아하는데?”


순간 위화감이 느껴져서 연수연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들어 올려서 한새벽을 지켜보았다. 무심함을 가장한 그의 눈이 이상하게 이글거렸다. 우산 손잡이를 쥔 큰 손에 힘이 들어간 것 같다. 그가 그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혼자 떠드는 것보단 대화를 하는 게 나았다.


“유머 있는 남자? 시간약속도 잘 지키면 좋겠고. 그리고 좀 냉정한 나쁜 남자?”


연수연은 적당히 순정만화에서 눈여겨봤던 남자 주인공에 대해서 떠들었다. 두서없이 말이 나간 까닭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주인공을 섞어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아! 클래식도 좋아하고 공부도 잘해서 한국대 수석으로 입학하고! 또 뭐가 있지.”


“너 취향 진짜 까다롭다.”


가만두자니 손으로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취향이 쏟아진다. 한새벽은 그녀의 말을 잊지 않게 연신 떠올리면서 이맛살을 구겼다. 하나하나 쉬운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야, 까다롭긴 내가 뭐가 까다롭냐? 그러는 너는 어떤 여자가 좋은데?”


“나는 이상형이 하나야.”


“뭐, 예쁜 여자?”


‘그저 남자들이란 얼굴만 밝히지.’ 연수연이 연신 재잘거렸다. 그녀의 말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연수연의 모든 것이 너무나 예뻐 보였기 때문이다. 한새벽은 제 어깨를 적시는 빗물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체온이 마주 닿은 왼쪽 어깨에선 명백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맥이 헐떡거렸다. 그녀 쪽으로 우산을 더 기울였다.


“아니. 내가 좋아하는 여자.”


그녀가 예뻐서 좋아하던가. 한새벽은 확신할 수 없었다. 소녀의 목소리와 알맞은 키와 쾌활한 성격과 반듯한 걸음걸이까지 좋았다. 연수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네. 새벽아 너 진짜 로맨틱하다. 나는 엄청 까다로운 여자구나.”


연수연은 이제야 알았다며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한새벽은 긴장감에 점점 얼굴이 굳었다. 어느새 멀리서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누가 정류장을 이렇게 가까이 지었단 말인가.’


매일 아침 정류장이 학교 정문에서 멀다며 투덜거렸던 것을 벌써 잊은 모양이다. 연수연은 멀리서 보이는 버스정류장이 반가운지 반들거리는 입술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한새벽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는 눈에 보이는 가게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저기! 나 집에 가기 전에 저기서 뭘 사야 해!”


간판은 여자들이 좋아할 법한 아기자기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색상은 분홍색이었다. 연수연의 시선에 의심이 담겼다.


“저기서 뭘 산다고? 여자 속옷 가게에서?”


한새벽은 미처 창으로 보이는 마네킹을 살피지 못했었다. 중요 부위만 겨우 가린 속옷을 확인한 한새벽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바르르 떨리는 손가락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연수연은 연신 가게와 한새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옆에.”


요란한 간판으로 도배된 그곳을 보고 연수연이 이번엔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한새벽의 팔꿈치 근처를 잡고 흔들며 걸음을 재촉하기도 했다.


“마카롱!! 너도 마카롱 좋아하는구나!”


‘마카롱은 또 뭐야.’


한새벽은 그저 연수연과 같이 있고 싶었을 뿐이다. 보기만 해도 달콤한 가게의 외관에서 심리적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연수연이 좋아하지 않는가. 한새벽은 비장한 표정으로 마카롱 가게의 손잡이를 열었다.


“어서 오세요.”


“사장님!! 오늘 마카롱 다 안 팔렸어요?”


“하하, 요즘 방학이라서 아직 수량이 남아있어.”


“와!! 새벽아, 우리 완전 럭키다! 여기 매번 동나서 잘 못 사!”


연수연은 동그랗고 작은 색색의 마카롱을 바라보면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한새벽이 오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살갑게 굴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새벽아, 너 몇 개나 살 거야?”


기대감을 담은 그 목소리에 한새벽은 신중히 마카롱을 노려보았다. 저 설탕 덩어리 같은 비주얼은 무엇인가. 한새벽은 단 것은 질색이었다. 그의 가족들의 입맛도 그와 비슷했다.


“…남은 거 다 주세요.”


연수연의 얼굴에 실망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한새벽이 사고 남은 것을 가져가려고 했건만 한새벽도 마카롱 킬러인 모양이다. 한새벽은 왜 연수연이 실망했는지도 모르면서 카드를 내밀었다.


상자에 포장된 마카롱은 열 개나 되었다. 달콤한 쓰레기를 열 개나 산 것이다. 집에 가져가는 순간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것이다.


연수연은 생기를 잃은 것처럼 비척비척 걸었다. 다시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한새벽은 머뭇거리다가 포장된 상자를 연수연에게 통째로 건넸다.


“이거. 선물이야. 그동안 학생회 일에 참여 못 해서 미안해. 개학하면…그때부턴 꼭 참여할게.”


한새벽 식의 사과였다. 연수연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다. 과즙처럼 흘러내리는 웃음이 보기 좋았다. 어느새 걸음은 버스 정류장의 지붕 아래에 닿았다.


“고마워. 나 마카롱 정말 좋아해. 우리 엄마도 이 가게 마카롱 엄청나게 좋아해.”


“그거 얼마나 한다고. 자주 사드려.”


한새벽이 애늙은이처럼 말했다. 연수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요즘 부모님이 자주 집을 비워서 그래.”


연수연이 연신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새벽은 소녀를 계속 지켜보고 싶었지만, 빗물이 떨어지는 우산을 접어야 했다. 한새벽이 노란 우산을 접어서 연수연에게 다시 내미는 동안 그 자리에서 마카롱의 비닐을 벗긴 연수연이 씩 웃으며 손을 뻗어서 한새벽의 입가 근처에 마카롱을 들이밀었다.


“아~”


“뭐, 뭐 하는 거야!”


한새벽이 저도 모르게 까칠하게 반응했다. 연수연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의 입에 마카롱을 쑤셔 넣고 딩글댕글 웃었다. 그 나이대의 소녀답게 맑은 웃음이었다.


“맛있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맛이야! 선물 고마워!”


마침 연수연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정류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한새벽은 입에서 녹아내리는 머리가 찡할 정도로 단 마카롱을 저도 모르게 씹었다가 인상을 구겼다. 차라리 매운 캡사이신이 나을 것 같았다. 도로 뱉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하하, 너 진짜 웃기게 생겼다. 개학하고 봐!”


연수연은 인상을 구긴 한새벽을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버스의 문은 야속하게도 금방 닫혔다. 빈자리에 재빨리 앉은 연수연이 창밖을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난 웃기게 생긴 게 아니라 잘생겼다고.”


한새벽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연수연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는 날이 있을까 싶어질 정도로 어울리는 미소였다. 한새벽은 손을 들어 올려서 인사를 건넸다.


버스는 정류장을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뒤늦게 떠올렸다.


“아, 나도 저 버스 타야 하는데.”


깨달음이 늦었다. 한새벽은 제가 한심해서 비에 젖은 머리를 털어냈다. 오른쪽 어깨가 축축했다. 한새벽은 제 가방을 뒤져서 곱게 접힌 삼단 우산을 발견했다.


그의 가정부는 기상청에서 모셔가야 할 인재이다. 비가 오는 날에는 늘 무릎을 짚으며 그에게 우산을 챙겨가라고 소리쳤고 한새벽은 모범생이었다.


“…개학하면 만날 거니까.”


그때의 한새벽은 희망에 부풀어있었다. 다음에 여인이 된 소녀를 만나기까지 계절이 몇번을 돌아야 하는지 알지 못한 소년은 떠날 때와 달리 가벼운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손 빠른 작가는 자주 연재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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