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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맑음 Aug 16. 2024

[로맨스소설] X의 자서전 3화

X의 자서전 3화

3화


누군가 한새벽에게 ‘넌 내일 그 사람한테 첫눈에 반할 거야.’와 같은 말을 했다면 한새벽은 코웃음을 치며 ‘너 머리가 좀 아프니.’와 같은 말을 돌려서 전했을 것이다.


그날은 유독 날이 맑았다. 평소 한새벽만 보면 잔소리를 쏟아내는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한식은 기가 막히게 만들지만, 그가 좋아하는 커피는 엉망으로 내리는 가정부가 웬일로 솜씨를 발휘한 날이기도 했다.


가정부가 만들어준, 어쩌다 한 실수에 가까운 완벽한 커피를 테이크아웃 잔에 담아 손에 들고 한새벽은 등굣길에 올랐다. 소박하게 생활한 적도 없지만 ‘서민.’들 앞에서 자제해야 한다고 늘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말씀에 반발심을 느끼면서도 ‘억!’ 소리 나올 만큼 비싼 집안의 외제 차 대신 버스에 오르는 것이 한새벽이었다.


버스에서 졸았던 것 같다. 한새벽의 집은 종점에 가까웠다. 그래서 새벽이 버스에 올랐을 때는 빈자리가 많았다. 잠깐 앉아있는다는 것이 어느새 머리를 앞뒤로 흔들며 자고 있었다. 하얀 이어폰 줄은 그의 귀에 경쾌한 음악을 흘려보냈기에 시끄러운 버스 안의 상황도 모르고 단잠에 빠졌다.


“야!”


한새벽은 몰랐겠지만 그의 앞에 선 여학생은 인상을 구긴 채 팔짱을 끼었다. 무의식중이겠지만 소년이 쥐고 있는 컵이 곧 쏟아질 것처럼 흔들렸다. 덜컹, 과속방지턱을 커다란 버스가 넘을 때 기어이 한새벽은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놓쳤고, 그것이 바닥으로 떨어져 사방으로 퍼지기 전에 그의 앞에 서 있던 여학생은 몸을 날려 받아냈다.


앉아있던 한새벽이 놓친 커피를 아슬아슬 받아 낸 소녀는 무릎을 꿇은 채 한새벽의 허벅지 부근에 손을 올려 몸을 지지했다. 그 바람에 놀란 한새벽이 눈을 떴다. 기다란 속눈썹이 흔들리며 이내 그의 동공이 드러났을 때, 소녀 연수연은 커피를 받아낸 뿌듯함에 웃고 있었다.


답답한 공기를 환기하기 위해 열어둔 창문 틈으로 꽃향기가 실려 왔다. 향기를 싣고 온 바람은 그녀의 동그란 뺨 위에 벚꽃 잎 한 조각을 올려두었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가지런한 하얀 이가 보였다.


한새벽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의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음악은 얄궂게도 첫사랑에 빠진 감정을 묘사하고 있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 속에 너의 미소가 내게 다가와.’

‘마음 깊이 새겨진 너의 모습, 첫눈에 반한 그 순간.’

‘심장이 두근두근, 두근두근.’


그만 두근거렸으면 좋겠다.


한새벽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려두었다. 얼굴을 붉히지 않는 것이 한새벽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저도 모르게 제 허벅지를 짚고 저를 올려다보는 여자의 교복 상위에 위치한 명찰을 훑었다.


‘연수연.’


소녀는 얇은 입술을 움직여 그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꿈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었다. 한새벽이 반응하지 않자 소녀는 그의 귀에 꽂힌 이어폰을 손으로 잡아 내리며 그의 손에 커피를 쥐여줬다.


“정신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한새벽은 소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이 부끄러워 저도 모르게 창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창문에 비친 소녀의 얼굴은 화가 난 것 같았다.


“야! 너 명찰 색 보니 같은 학년인데! 여기 노약자석이잖아! 자리 비켜드리라고!”


한새벽은 잠시 멍하니 있었고 감미로운 목소리에 실린 노기를 알아차리고 그제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팡이를 짚고 있던 노인은 연수연에게 몸을 기댄 채 겨우 서 있었다.


연수연은 한새벽이 노약자석에서 일어서자 친절한 태도로 자신에게 몸을 기댄 노인이 자리에 앉도록 도와주었다. 연신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서 과즙이 데구루루 하고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뭐라고 변명해야 하는데!’


잠깐 잠든 거라고, 알았으면 금방 일어났을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주변에 선 여학생들이 저를 힐끗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한새벽은 자신이 잘생긴 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첫 만남에 튼실한 허벅지에 손까지 올린 연수연은 그에게 다시 시선을 주지 않았다.


버스는 어느새 학교 앞 정류장에 닿았다. 연수연은 잡을 새도 없이 재빠른 다람쥐처럼 버스에서 탈주해 학교를 향해 바쁜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봄바람에 소녀의 치맛자락이 연신 살랑거렸다.


첫눈에 소녀에게 반한 소년은 멍청히 그 뒷모습만 보고 있다가 교복을 보고 학교를 알아차린 버스 기사가 한소리를 하자 그제야 그림자처럼 비척비척 걸어서 버스에서 내려섰다. 사방에서 벚꽃 향이 풍겼다.


* * *


불시에 사랑에 빠진 한새벽은 저도 모르게 눈으로, 그리고 귀로 연수연을 쫓고 있었다. 소녀는 예쁘게 생겼다. 그리고 성격이 좋았다. 어디를 가던 학교의 학생들은 연수연을 주목했고 그녀가 학생회장 후보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신을 차리니 후보자로 등록하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 한새벽도 알지 못했다. 그녀와 한 공간에 묶이는 마법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연수연은 선거유세에 진심으로 임하고 있었다. 또래 남자아이들이 으레 관심을 가질 법한 걸그룹의 노래에 맞춰서 춤을 추기도 했다.


그럴 때 한새벽은 저도 모르게 꿈틀거리는 입매를 감추기 위해서 손으로 입가를 가려야 했다. 연수연은 예쁘게 생긴 것뿐만 아니라 행동이 귀엽기까지 했다.


연수연의 선거유세만 쫓아다니느라 정작 한새벽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연수연은 그녀가 바라던 대로 학생회장이 되었고 한새벽은 부회장이 되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녀와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한새벽은 한 번도 학생회실로 걸음 하지 못했다.


* * *


“바보냐! 멍청이냐고! 왜 좋아한다, 아니 잘해보자 말을 못 하냐고!!”

손을 잡았다. 악수하자며 하얗고 작은 손을 내밀었을 때 한새벽은 패닉상태였다. 아니, 우연히 연수연과 마주친 순간부터 한새벽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애냐? 웬 코코아? 그리고 냄새나.’


한새벽은 제 입을 찰싹찰싹 때렸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억울했다. 새벽은 단 것은 질색이었지만 소녀가 쥐여준 코코아에선 온기가 느껴졌다. 수건에선 아주 희미하게 비누 향이 풍겼다. 냄새가 난다며 책상에 던질 정도는 아니었다.


한새벽은 제가 이토록 숫기가 없는지 몰랐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헛소리만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한새벽은 신경쇠약에 걸린 소년처럼 잠들지 못했고 결국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했다. 방학 중인 학교는 고요했다. 어깨 위로 흐르는 빗줄기가 몸을 적셨다.


머리가 복잡했다. 누군가에겐 정치인의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축복이겠지만 한새벽은 아니었다. 정치 명문가인 그의 집안에선 그는 환영받지 못했다. 한새벽은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고 사춘기였다. 성적이 조금 떨어졌다.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수학 문제를 풀다가도 그녀의 말간 얼굴이 생각났다. 수업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성적이 떨어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했다.


그래서 뺨을 맞았다. 이게 정상일까.


한새벽은 유감스럽게도 반항아가 아니었기에 그의 도피처는 학교였다. 학생회실로 걸음을 옮긴 까닭은 그의 마음에 들어앉은 소녀가 자주 머무는 장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새벽 개새끼야!! 나한테 왜 이러냐고!!’


기대고 있던 벽의 옆에서 창문이 휙 열리더니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목소리는 그의 귀에 익숙했다. 연수연이었다.


‘미안하다고 해야지. 그리고 앞을 잘하고 싶다고 해야지.’


한새벽도 제가 무엇을 잘못 했는지는 알았다. 부학생회장으로 선출되어서 그녀를 도왔어야 한다. 그러나 차마 발걸음을 옮길 용기가 없었다. 앞에 나서지도 못하는데 말을 나누지도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새벽은 그녀와 손을 마주 잡기에, 그리고 밀폐된 장소에서 그녀와 둘이 있기에는 너무나 수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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