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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맑음 Aug 09. 2024

[로맨스소설] x의 자서전 1화

1화


연수연은 누군가의 집무실에 앉아있었다. 단조로운 회색 벽지는 사무실의 주인의 성격을 상상하게 했다. 긴장감에 긴 손톱을 잘근잘근 씹다가 손을 내려두었다. 손질해서 길렀다기 보다는 아무렇게나 방치한 것에 가까운 손톱이었다.


화상회의용 스크린은 큼지막하게 단조로운 벽을 장식했으나 꺼진 상태였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클래식은 주인이 어쩌면 고상한 성격을 가진 것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아니, 상상은 아니었다. 연수연은 이 사무실의 주인을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고 H라인 녹색 치마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의 비서가 싱긋 웃으며 연수연에게 블랙커피를 내어주었다. 비서는 고양이상의 미인으로 그린듯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도 괜히 주눅이 들었다.


시선을 내리자 세탁을 했으나 손때가 탄 셔츠의 소매가 보였다. 입고온 붉은 체크무늬를 가진 셔츠가 괜히 꼬깃해보여서 손으로 쭉쭉 늘리며 머리에 눌러쓴 캡모자를 흔들었다.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를 가린 모자가 방패막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의원님은 10분 후 도착하실거예요. 그동안 커피를 드시면서 편안하게 계세요. 귀한 작가님이 방문해 주시니 잘 부탁드린다고 여러번 당부하셨어요.”


연수연은 어색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그녀가 아는 남자라면 굳이 비서에게 저에 대한 것을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는 제법 다정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속은 누구보다 차가웠던 사람이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현재의 그에 대해선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연수연은 과거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을까. 세심하게 그녀에 대한 케어를 부탁했다면 블랙커피는 부탁하지 않았겠지. 연수연은 너무 써서 눈물이 핑 돌것 같은 블랙커피를 마시며 손을 조금 떨었다.


“어머, 긴장하시 마세요. 의원님 무서운 분 아니에요.”


비서인 여자는 연수연보다 서너살이 많은 것 같았다. 손까지 떨면서 긴장한 수연이 귀여운 것처럼 미소지었다. 묻지도 않은 제 여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오지랖이 넓지만 과하지 않은 타입이었다. 그러나 연수연이 손을 떠는 이유에 대해서 그녀는 잘 못 짚었다.


연수연은 팔리지 않는 작가였고 비서인 여자의 상식에서는 작가란 블랙커피를 링거 삼아서 작품을 써내려가는 폐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수연은 쓴 것, 신 것은 입에도 못 대는 어린애의 입맛을 가진 어른이었다. 그녀에게 블랙커피는 가혹할 정도로 썼다.


“...고맙습니다.”


연수연은 자상하게 챙겨주는 비서언니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다른 음료를 달라는 말도 하지 않고 그녀 몫으로 주어진 블랙커피를 꾸역꾸역 넘겼다. 긴장감에 목이 탔기 때문이다.


연수연은 응접용 테이블의 맞은편에 걸린 시계를 힐끗거렸다. 남자는 꽤나 정확한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초침이 지나가는 것을 신중히 응시했다. 남자가 10분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어림잡은 것이 아니었다. 서두르지 않고 품위를 지킬만큼 여유를 두고 1~2분 정도 문앞에서 시간이 당도하길 기다린 이후 문을 돌릴 것이다.


연수연이 아는 남자는 그러했다. 고작 스물한살의 나이로도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숙한 남자였다. 연수연은 아직도 조잘거리는 비서를 향해서 평온함을 가장하여 말을 던졌다.


“의원님은…어떤 분이세요?”


“잘생긴 분이죠. 젠틀하시고요.”


어떤 사람이냐는 말에 단번에 잘생겼다는 인상을 떠올릴만큼 미남이란 것은 스크린을 통해서 보았다. 남자는 의원보다는 배우가 되는 편이 어울렸을 것이다. 실제로 어린 시절에는 연기를 했던 적도 있지 않던가.


연수연의 눈은 다시 시계로 돌아갔다. 째깍째각. 초침이 숫자를 스쳐갔다. 비서가 이야기한 10분이 정확히 지났다. 초침이 두번 움직일 정도의 여유를 두고 제 사무실임에도 똑똑 소리를 내면서 노크를 한 남자가 천천히 문을 열고 걸어들어왔다.


“의원님, 손님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자의 목소리는 배경처럼 멀어졌다. 선명하게 눈에 박히는 그의 모습에 연수연은 저도 모르게 입을 헤하고 벌렸다. 뒤로 넘겨 이마를 드러낸 헤어스타일, 둥그란 이마와 서글서글한 눈매. 그러나 코가 오똑하고 날렵한 그는 그가 과거에 알던 그 남자, 한새벽이었다.


남자의 검은 구두는 led조명의 빛을 반사했다. 몸에 핏되게 떨어지는 수트는 정갈한 청색빛이 돌았다. 그리고 그의 당을 상징하는 넥타이. 그리고 다정함을 표방하였지만 숨길 수 없는 찬기를 감춘 미소.


“귀한 손님을 모십니다. 저는 정치인 한새벽입니다.”


그녀의 앞에 내밀어진 손은 하얗고 커다랗다. 연수연은 어색하게 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마주잡은 두손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악수를 한 것이다.


비서는 노란 종이봉투에 담긴 인쇄물을 그에게 내밀었다. 한새벽은 제 이름처럼 고요하게 그녀가 내민 인쇄물을 훑어보았다. 연수연의 이력서였다. 연수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푹 숙였다. 빛바랜 청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한때는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렀던 청바지는 이제는 탁한 잿빛이었다. 그것이 꼭 제 인생처럼 느껴졌다. 한국의 새벽, 새벽을 맞이하는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젊은 정치인 한새벽에 비하면 현재의 그녀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동문이네요.”


침묵하던 남자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입꼬리만 올린채로 웃는 그의 얼굴에서 눈 만은 너무 검어서 푸른빛이 도는 고요한 바다같았다. 수연은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대 나오셨네요. 좋은 대학이죠.”


남자는 연수연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가 그녀를 알아보고 반가워할까, 혹은 자그마한 감탄사를 터트릴까 상상하면서도 부담스러워했던 것은 지나친 작가적 상상력이었나보다. 그들의 나이는 이미 30대 초반이다. 20대의 첫자락에 짧게 만난 x는 진작 잊은 모양이다.


연수연은 그제야 슬쩍 고개를 들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남자는 키가 무척 컸고 그 탓에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캡모자가 그녀의 이목구비 중 절반을 가려서 보이는 것은 얇은 입술 뿐이었다.


“네. 국어국문과를 나왔어요. 주로 소설을 썼고요.”


그녀가 과거 연인이었던 한새벽의 앞에 이력서를 내밀게 된 사유는 간단했다. 팔리지 않는 소설가. 수입이라곤 전무하다 싶었고 한새벽은 제 자서전을 대필해주는 조건으로 꽤나 큰 금액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저에게 이 일을 제시했던 친우, 서영란을 떠올리며 이를 악문채 웃었다.


“그렇군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남자는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한새벽의 손톱은 잘 정리되어있었고 내민 손은 호방해보이기까지 했다. 한새벽은 남자의 손을 마주잡으며 다시금 파르르 입꼬리를 떨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 다행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군요.”


담담하게 내뱉은 그의 말이 소위 말하는 플러팅일까. 연수연은 잠깐 멈칫했다. 남자는 가끔 헷갈리게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연수연은 과거를 떠올렸다. 그를 다루는 방법은 정확히 무슨 뜻으로 말한 것인지 다시 묻는 것이다.


“…무슨 뜻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오해하지 않고 싶었지만 그는 잘생긴 정치인이었다. 그녀의 남자친구였고 또한 첫사랑이었다. 그러니 귀끝이 붉어진 정도는 흠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름 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름이예요.”

‘아, 예. 이름이 취향이시군요.’


연수연은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빈정거리는 어투가 되는 것은 약간의 기대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입을 꾹 다문 연수연의 입매를 보던 한새벽은 그제야 눈을 휘면서 웃었다.


“예전에 좋아했던 여자의 이름이예요. 두 번이나요.”


‘이새끼, 이제보니 내 이름을 좋아했던거군.’


연수연의 눈매가 싸늘하게 굳었다. 잘난 한새벽, 수연이라는 이름의 여자를 수집하는 이상한 성벽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두번이나 같은 이름을 좋아했다고 말하는 그를 보이지 않게 흘겨보면서 마주잡았던 손을 놓았다. 분풀이를 하듯이 작게 탈탈 마주잡은 손을 터는 행위는 약간의 앙탈이라고 보아도 좋았다.


“그렇군요. 의원님 이름도 멋지세요. 형님의 이름은 한벼락이거나 그런가요?”


한새벽과 연수연은 둘의 나이 22살, 두 달간의 짧은 연애를 했지만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대학이 아니었다. 고등학생 시절 둘은 같이 학생회 활동을 했고 한새벽의 집안은 유명했다. 그의 두살 터울의 형은 한여울이었다. 우스운 이름으로 부른 것은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첫사랑을 향한 심술이었다.


“네. 어찌 아셨습니까? 자료 조사를 정말 많이 하신 모양이군요.”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농담을 받아쳤다. 연수연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기침을 토하듯 짧게 웃었다. 남자는 늘 그랬다. 진지한 얼굴로 농담인지도 모르게 농을 건냈고, 굳이 농담이었다고 정정하지도 않아서 그녀를 곤란하게 만든 적도 많았다.


“하하, 그럴리가요. 아무리 의원님이 유명하시다고 해도 제가 어찌 형님이름을 조사하겠습니까. 아버님의 이름은 그럼 혹시 한새별인가요?”


새별이라니. 정치인으로 치자면 명문가인 그의 가문에선 줄줄이 우수한 정치인을 배출했다. 그의 아버지의 강직한 얼굴에는 더없이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한새벽은 마치 감탄했다는 듯이 ‘아.’하고 짧은 탄성을 터트리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보니 점쟁이인 모양이군요. 정확하십니다.”


연수연은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한새벽을 바라보았다. 18살, 22살의 그녀와 달리 지금의 그녀는 매우 성숙한 어른이었다. 그러니 비속어는 자제하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이새끼 또라이아니야.’


잘생긴 또라이는 여전히 가면이라도 뒤집어 쓴 것처럼 웃었다. 연수연의 의식은 순식간에 그를 처음 만났던 그 여름으로 흘러갔다.


* * *




만나서 반갑습니다. :)

김 맑음입니다.

에세이 장르도 현재 브런치스토리에서 연재하고 있지만,

주력 장르인 소설도 보여드리고 싶어서 연재를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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