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베카 Feb 20. 2024

마음속에 공백을 ‘그리다’

나도 모르게..



 내 죄책감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사춘기의 끝없는 질문들 중에 하나였다. 아빠의 장례식, 얼마 지나지 않은 그즈음일 거다. 스스로 조절이 안될 만큼 엄마가 울분을 토해내던 그때. 아빠에게 라이터를 가져다준 나를 책망했었다. 날카로운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의 죄책감은 학습된 죄책감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충격과 공포를 잊은 적이 없다.


내가 분했던 건 당연히 기억할 줄 알았는데 사춘기 때의 반항으로 나간 말에, 엄마는 그런 적이 없다며 단칼에 잘랐다. 난 그 죄책감으로 많은 것을 참고, 또 참아왔는데… 꽤 긴 시간을 그날의 냄새가 쫓아다녔고 생생한 기억이 뒤따라왔었는데.. 저리 간단히 아니라 할 수 있는 거였구나.. 뜻밖의 깨달음과 그 상대가 ‘엄마’라는 사실에 분함이 올라왔다. 아니라는 단호한 말 다음에 그간 내 상처에 대해서 묻는 질문이나 걱정 어린 말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아니다’가 다였다. 매몰찰정도로 깔끔했다.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매몰참’이 더 체감이 된다. 나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이 조금의 상처만 나도 내가 더 아팠다. 그리고 속상했었다. 혹여라도 엄마의 속상함을 다그치는 걸로 오해할까 봐 아이를 감싸 안고는 연신 눈물을 닦아주고 등을 쓸어주며 차분히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근데 가슴을 부여잡으며 토해내는 자식의 말에 그렇게 반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삐삐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 유일하게 주고받는 번호는 집전화번호가 전부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아파트 단지 앞 맞은편 작은 횡단보도에서 초록불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호등이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뀌자 나는 인도에서 횡단보도로 한발 내려갔다. 근데 그 순간 가스배달부의 오토바이가 내 왼쪽 무릎을 치고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같이 길을 건너던 어른들도 놀라는 사이, 내가 주저앉았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정말 살짝 치고 가는 느낌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다리가 말을 안 들었다. 그냥 집에 가겠다고 말은 했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다. 주위 어른들의 만류와 빠른 대처로 나는 응급실로 옮겨졌다.


어린아이가 혼자 실려왔으니 병원에서는 집번호와 이름을 물었다. 엄마에게 연락해 준다는 말에 아주 조금 안심이 됐다. 처음 가본 응급실의 광경은 너무 어수선한 동시에 무서웠다. 아프고 다친 사람들이 이리 실려왔다-저리 실려갔다. 분주했다. 빨리 엄마가 와서 집에 가고만 싶었다. 그때 헐레벌떡 누군가 흐트러진 차림으로 나를 찾았다. ‘엄마다. 너무 무서웠어 엄마…’


그런데 내가 마주친 건 집주인아주머니의 차가운 멘트였다. ‘딸이 응급실로 실려갔다고 해서 급히 왔더니 너였니? 너희 엄마는?’ 걱정스러운 눈빛이 차갑게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귀찮다는 듯이 투덜거리고는 집주인아주머니는 이내 사라졌다.


눈물이 차오르는데 울 수가 없었다. 울면, 울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내가 지금 혼자라는 걸- 확인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두려움이 점점 커지면서 시간이 자꾸만 흘러갔다. 한참을 방치된 채 있던 나를 어떤 아저씨가 찾아왔다. 엄마친구란다. 처음 보는 아저씨인데 말이다. 상처를 살펴보고는 또 사라졌다. 그 사이 가스배달부 아저씨도 왔다 갔다.


영원이라는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몇 시간이 지난 후에 엄마가 왔지만, 다급하게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머리며 옷차림이며 흐트러진 채로 거친 숨소리를 내며 딸을 찾느라 분주했던 집주인아주머니와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기다린 시간이 허무할 정도로 수속은 빠르게 치러지고 집에 도착했다. 그날 나의 마음속으로 알 수 없는 공백이 생겼다.




 그 당시 제일 좋은 방문선물은 과일바구니도 아니고 꽃다발도 아니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받아볼까 말까 한 바로 어린이용 ‘종합과자선물세트’였다.


작은 상자에 평소에는 맘껏 먹지 못하는 여러 가지 군것질 거리가 한가득 들어있어 보기만 해도 행복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화려한 겉포장도 한몫했을 테다. 그 ‘과자선물박스’를 처음 받아본 것은 우리 집으로 어떤 아저씨가 방문했을 때였다. 처음 보는 낯선 아저씨였는데 어리둥절한 우리들에게 과자박스를 내밀고는 자연스럽게 현관문턱을 넘었다. 엄마 친구라고 소개를 받았는데, 사실 왜 왔는지 기억도 안 난다. 어두운 밤, 우리들의 관심사는 처음 받아보는 과자박스에 꽂혀있었다. 밤이라 먹지도 못하고, 아까운 마음에 쓰다듬다 잠들었다.


 그 뒤로 그런 만남은 계속되었다. 엄마가 아플 때마다 링거를 들고 와서는 몇 시간씩 앉아있다가 가는 아저씨에, 힐튼호텔 아저씨, 군인아저씨, 성당으로 공원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절두산아저씨, 동업자로 오랜 시간 옆에 있던 아저씨에 파계승 같은 스님까지 지금은 얼굴도 자세히 기억 안 나는 ‘엄마의 친구들’을 소개받은 기억들이다.


그 모두가 ‘아빠’ 후보였다면 할머니에게 죄송한 일이다. 할머니가 강조하셨던 ‘엄마 재혼시켜라.’, ‘반대 마라.’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딸을 너무도 모르셨다.





#마음속고향 같은#어머니는없었다

#적어도#내게는






이전 04화 화사하게 채색된 추억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