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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베카 Feb 13. 2024

화사하게 채색된 추억들

입학식, 졸업식의 꽃다발은 없지만..


우리가 세를 살던 아파트의 뒤편으로 작은 공터가 있고 그 뒤로 수정이가 사는 아파트가 서있었다. 아파트 뒤편이 현관문이라 햇살이 들이쳐오는 아침풍경은 만나 본 적이 없다. 문을 열면 이미 아파트 그늘이 잡초가 가득한 공터까지 길게 늘어져 아침치고는 싸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말이 아파트지 우리 집은 집구색도 겨우 갖춰 허름하고, 전용화장실도 없었으며-집주인 화장실을 같이 썼다-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문옆으로 늘어선 다 타버린 연탄들의 재로 지저분한 그런 곳이었다. 아파트에서 연탄이라니… 요즘 아이들은 상상도 못 하리라.


가끔 삐걱거리는 문이 열리지 않아 갇혀있다가 탈출하는 꿈을 꾸면 으레 그 아파트 뒤편이었다. 똑같은 문이 좌우로 길게 늘어선 공포에 아우성치다가 깨곤 했다. 지겹도록 오래 꾼 악몽의 배경지였다.




등교하던 길이 생각난다. 집문을 열고 나와 이른 아침부터 아파트 그늘로 썰렁한 뒷길을 크게 돌아서, 햇살이 들이치는 아파트 정면의 잘 정돈된 정원을 지나면 아파트 단지 입구가 나온다. 바로 앞 2차선 도로의 짧은 횡단보도를 건너면 양옆으로 늘어선 상가와 상가의 사잇길로 이어진다. 달리는 차와 오토바이들을 피해 길의 가장자리로 걷다가 좌회전하면 다시 양옆에 낮은 상가들이 줄지어진 골목이 시작되는데, 그 길을 계속 걷다 보면 양옆으로 라이벌 관계인 문방구가 나타난다. 그럼 학교정문 앞 도착이었다.


양쪽에 들어선 두 문방구 앞에는 아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갖가지 아이디어의 불량식품이 자판에 가득했고 동아백과사전과 표준백과사전이 학년별로 나와 있기도 했다. 그날 필요한 준비물이나 과학상자, 고무줄비행기, 학용품, 또는 친구생일선물로 인기였던 천 원짜리 문구세트와 문제집까지 없는 게 없는 문방구였다.


불량식품을 잘 숨겨서 정문 앞 선도부원을 무사히 지나면, 아침운동이 중요하다는 교장선생님의 의견에 따라 학교운동장을 우측으로 크게 한 바퀴 돌아서 들어간다. 정문을 넘어서면 바로 위로 올려다볼 정도로 큰, 책을 든 소녀상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기증하신 조각상이었다.-할아버지께서는 기증기념사진도 가지고 계셨다.-그래서 간질거리는 가벼운 입을 단속하고 흐뭇하게 보고는 동물 조각상들이 줄지어진 운동장 우측으로 걸었다.


구름다리를 지나 테니스코트와 등나무 교실을 지나면-심지어 신호등도 있었다. 얼마나 운동장 한 바퀴에 진심인 건지!-ㄱ자 모양의 학교건물의 정중앙에 캐노피 공간이 있는데 아이들은 여기서 실내화로 갈아 신고 우르르 건물에 들어갔다. 1층은 교무실과 보건실 과학실 등의 특수교실이 있고, 2층부터는 학년별 교실이 있었다.


국민학교시절의 대부분을 이 학교에서 보냈는데,  정작 1학년 2학기부터 6학년 1학기까지 다녀서 입학식과 졸업식은 못한 나의 국민학교였다. 그래서 1학년부터 6학년까지를 함께한 친구들의 얼굴을 담은 졸업앨범이 슬프게도 나는 없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돌면 곳곳에 추억이 없는 곳이 없다. 세 걸음만 걸어도 새로운 추억이 생각날 정도이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테니스’다.

지금처럼 초등학교에서 신청을 받아 방과 후수업을 듣는 게 자연스러운 요즘과는 다르게 그때는 담임선생님이 좀 더 공부가 필요한 학생을 교실에 남겨서 나머지 공부를 시키는 게 다였다. 그 시절 선생님들의 정이였고 아이들에겐 창피한 부름이었다:)

그런 시절에 학교에 테니스코트가 있고 운동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학교 우측으로 콘크리트 벽이 세워진 가장자리에 테니스코트가 있고 작은 창고 같은 곳에 테니스용품이 정리되어 있었는데 아마 3학년 때부터였을 거다. 코트 내 콘크리트 벽에 벽치기를 하면서 연습을 시작했는데, 테니스공 특유의 ‘팡’ 소리가 너무 좋았다. 잘 치는 언니 오빠들이 라켓으로 주고받는 공에서는 청량한 ‘팡’ 소리가 나고는 했는데, 벽치기를 하는 내 공에서는 똑같은 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빨리 실력을 키워 그 소리를 내보고 싶었다. 라켓에 닿는 순간 터지는 속이 시원해지는 그 소리말이다. 그래서 방과 후 테니스코트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이때가 간간히 내 인생에 등장하는 테니스와의 인연이 시작된 때이다.  


유난히 동상이 많았던 학교운동장은 기린, 호랑이 등등 여러 동물들의 동상부터 이순신, 세종대왕 동상에 책 읽는 소녀상까지 상당수의 동상들이 학교 운동장 둘레 곳곳에 위치해 있었다. 밤이 되면 책 읽는 소녀상의 책장이 넘어가며 이순신장군님이 움직이시고 동물들 눈이 빨갛게 변한다는 둥 학교괴담도 꽤 됐다. 책 읽는 소녀상 기증자의 손주인 나는 어이없어 콧웃음을 쳤지만… 대다수 친구들은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재미난 이야기를 하듯 키득대고는 했다. 이제는 그것도 추억의 한 페이지다.


야외수업을 하거나,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에 친구들과 놀던 등나무교실은 꽃이 피는 계절에는 지붕을 다 덮고도 늘어져 흐드러지게 피는 꽃들이 바람에 날려 진풍경을 자아냈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놀 때도, 싸우며 씩씩거릴 때도, 선생님한테 혼나고 투덜거릴 때도 우리는 야외 등나무교실에 모였다.

콘크리트로 만든, 나무를 잘라 모양을 낸 것 같은 둥근 디자인과 디테일의 테이블과 의자들이 있었고 항상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이었다. 우리 때는 방과 후에 학원을 많이 다니던 시절이 아니어서 학교에서 죽치고 놀거나 단지를 뛰어다니며 밤이 되도록 노는 게 일상이었다. 등나무교실은 그중 하나인 우리의 아지트였다.


친구들이 있어 밤마다 문 앞을 지키는 불안을 숨기고 웃을 수 있었으며, 함께하는 동안은 가슴한구석 공허도 잊혀졌다. 항상 새로운 놀이가 생겨나고 추억이 피어나, 외로이 선 나를 지켰다. 가장 행복한 6년을 함께해 준 네 친구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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