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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베카 Feb 06. 2024

가을빛으로 물든 아파트

뒤편 셋방 문 앞은 잡초만 무성했다.


그 시절에 봐도 오래된 아파트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소리가 나는 나무스틱들로 모양을 낸 바닥과 마치 그 옛날 아궁이가 있던 시절의 주방처럼 큰 단을 하나 내려가야 하는 주방이 있었다. 할머니와 사는 수정이의 집이었다. 언니처럼 속도 깊고 다정한 친구였다. 수정이의 부모님도 함께 살았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수정이가 함께 사는 할머니 이야기를 할 때면 얼굴에 웃음빛이 돌고 행복해 보였다는 거다.

매일같이 다섯 명이서 우르르 몰려다니며 놀던 우리들은 하루는 수정이네 놀러 가 그 주방턱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짜장라면을 엄청나게 먹어댔었다.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까르르 웃으며 한 냄비를 다섯이 덤벼 거덜내고는 친구의 ‘더 해 먹을까?’ 한마디에 또 ‘그래그래’라며 맞장구치기를 몇 번을 반복했었다. 그 높은 주방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라면을 끓여주는라 힘들 텐데도 친구들의 성화에 그저 미소만 짓던 친구였다. 어른스러운 친구. 그리고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게 틀림없는 할머니얘기한정 수다쟁이 친구였다.




아빠와 살던 집을 팔아버리고 엄마는 외할머니가 계시는 동네의 옆으로 이사를 갔다. 예전의 우리 집에 비하면 형편없어 보이는 좁디좁은 집이었다. 아파트 일층에 있는 집을 방음이 안 되는 간이벽으로 둘로 나누고는 집문을 아파트 뒤편으로 낸 셋집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집주인아주머니’란 단어를 처음 배웠다. 같은 반 남자아이의 어머니이자 우리 집주인아주머니였다. 개학 전 날 학교 가기 싫다고 투덜거리면 다음날 반친구들이 모두 알고 있는 입 싼 남자아이의 셋집. 그곳이 우리의 새집이었다.


가을이 되면 높고 파란 하늘아래 단풍나무들이 작은 아파트 단지에 흩날리던 우리 집이 아니었다. 가끔 학교를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문을 열다 쥐새끼와 눈이 마주치는 그런 집이었다. 쥐덫과 쥐약을 설치하던 엄마의 모습이 기억난다. 누런 끈적이에 붙어 달아나지 못하고 잡힌 쥐 모습도… 참 열악한 주거환경이었다. 하지만 집투정을 부릴 수는 없었다. 내 탓이라 생각했으니 당연했다.


낮에는 학교에서 아파트 단지에서 친구들과 노느라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어둠이 내리고 친구들이 엄마의 보채는 소리에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어린 동생과 썰렁한 집으로 향했다. 들어가자마자 티브이를 크게 틀어놓고는 엄마가 아침에 싸두고 간 김치만 들어있는 김밥을 꾸역꾸역 먹었다. 티브이를 보다가 늦은 밤 동생이 잠들면 나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와 어두운 현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오늘 밤 엄마가 안 들어오면 어떡하지?’ 두려움에 오던 잠도 달아났다. 불안에 떨며 엄마가 올 때까지 자지 않고 버텼다. 매일매일.




그리 멀지 않은 옆 동네에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사셨다. 5층짜리 아파트였는데, 가을이면 아파트 단지입구부터 늘어선 커다란 은행나무들이 단지 끝까지 닿을 것 같은 넓고 긴 노란 카펫을 펼치고는 중후한 멋을 풍기는 곳이었다. 그렇게 예쁜 은행나무 아파트단지는 살면서 그곳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가을에 단지를 걷는 것만으로도 유치한 어린아이의 감성이 간질거렸다.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많고 아토피가 심해서 목, 귓불은 자주 찢어졌고 무릎 뒤, 팔꿈치 앞은 항상 피와 딱지가 번갈아 가며 나를 괴롭혔었다. 감기몸살도 잘 걸려서 고열에 학교를 못 가는 날은 할머니가 대신 간호를 해주러 오셨었고, 그나마 증세가 가벼운 날은 외할머니댁에 맡겨졌었다.


투박하지만 정이 많으신 분이었다. 그리고 셋째 딸이 가슴 아파 속으로 눈물도 많이 흘리셨을 ‘어머니’ 셨다. 할머니와 둘이 남으면 자주 듣던 말이 ‘너희 엄마 꼭 재혼시켜라.’, ‘반대 마라.‘ 였다. 어려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 듣던 말이라 내게 맡겨진 숙제 같았다. 도대체 방법도 모르겠고, 내키지도 않는 그런 숙제. 숙제가 내키지 않는다고 안 할 수가 있나! 어린 나이에 재혼이란 건 잘 모르겠지만 반대는 말아야겠다 다짐했다. 할머니가 그러라고 했고, 그게 엄마를 위한 거라고 하셨으니까. 그런가 보다 했었다.


여느 하루처럼 할머니집에 맡겨진 날이었다. 벨을 누르고 할머니댁 현관에 발을 딛었는데. 할머니가 이 시간에 학교에 안 가고 왜 또 왔냐고 하셨다. 화가 나신 할머니 모습에 당황하기를 첫 번째 그리고 서러운 마음이 두 번째였다. 나라고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닌데 말이다… 주눅이 들어 그대로 말 한마디 못해보고 나와, 손때가 묻어 맨질맨질한 나무난간을 짚으며 다시 5층에서 1층으로 힘겹게 내려갔다. 단지를 벗어나며 발끝에 닿아오는 노란 은행나무잎들이 터덜터덜 힘없이 걷는 내 발길질에, 뒤로 차여 날려댔다. 어린 마음에 눈물이 가득 차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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