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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베카 Jan 30. 2024

그 겨울의 끝자락_창백하게 붉은..

그앞에서 나를 잃었다.


다시 그 겨울의 끝자락_


커다란 꽃송이들이 가득 그려진 무거운 붉은 담요를 머리끝까지 쓰고는 아이처럼 장난스럽게 활짝 웃는 아빠. 나를 유독 예뻐해 주셨던 딸바보 아빠. 시계 보는 법을 가르쳐주셨던 다정한 아빠가 좋았다. 아이들은 기민하게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안다. 무조건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끔 태어나진 않는다는 거다.


그날 저녁에 아빠 분위기가 이상했다. 방 안에 앉아있는 모습이 쓸쓸해 보이기도..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슬퍼 보이기도 했다. 어린 내가 선뜻 다가가기엔 아빠 주위를 무거운 공기가 감싸고 있었다. 그래서 그저 멀리 떨어져 앉아 쳐다보기만 했었다. 눈을 떼면 사라져 버릴 것처럼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자리를 비운 엄마를 기다리는데 밤이 어두워질 때까지 엄마는 오질 않는다. 아빠가 담배를 태우게 라이터를 가져오라고 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라이터를 찾아 거실을 구석구석 열심히도 찾았다. 겨우 찾은 라이터를 아빠에게 내밀고는 다시 앉아있던 자리로 가 아빠를 다시 쳐다보기 시작했다.


근데.. ‘담배를 피우신다고 하지 않으셨나?’ ‘왜 꼬깃하게 말아쥔 종이 끝에 라이터를 갖다 대시지?’

순식간이었다. 담배로 향하던 종이에서 떨어진 불꽃이 술잔으로 그리고 다시 아빠에게로 불이 붙은 것은_


‘내가 소리를 질렀나?’ ‘아빠가 뭐라고 했었나?’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그렇다고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린 내게 소리마저 지워졌다.

거실 불빛만 스며들던 어두운 방안에서 환하게 타오르던 아빠가 검고 붉게 변할 때까지_. 시간이 멈추다시피 느리게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엄마가 다급한 몸짓으로 아빠를 이불로 감싸는 게 보였다. 빠르게 여러 사람들의 손에 의해 아빠가 현관문을 나선다.

붉은 자국이 안방에서 현관으로 이어졌다. 다시금 떠올려봐도 잔인할만큼 현실감이 느껴지지않는 순간이었다. 어린 나는 현실과 그외의 세계, 중간에 서서 나를 잃었다.


그리고 문이 닫힌 작은 방에서 밤을 새웠다. 어둡고 유난히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도 엄마와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간 내게 붉은 흔적만이 어젯밤일이 꿈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 일이 있은 후, 가족들은 잠시 떨어져 있어야 했다. 엄마와 아빠는 병원으로, 나와 동생은 이모네로_.


동갑내기 사촌의 집에서 지낸 지 며칠째 되던 날. 이른 아침의 부산스러움에 눈을 떴다. 오늘은 이모와 함께 시장을 간다. 왜 같이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따라나선 길에 이모가 아동복가게에서 발길을 멈췄다. 이 옷 저 옷 내 몸에 대보는데, 나의 의견은 필요가 없어 보였다.

전혀 아동복처럼 보이지 않는-아무도 사지 않을 것 같은-크고 긴 지퍼가 사선으로 달린 검정 가죽 원피스가_어리둥절한 내가 멍하니 서있던 사이에 후다닥 계산까지 마치고 내 손에 들려졌다.

그리고 빨지도 않은 새 원피스를 입고 눈치껏 이모를 따라나섰다.

‘이제 집에 가도 되나?’ 주지도 않은 눈칫밥에 내내 불편했던 사촌집이었다. 드디어 집에 갔으면…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어른들이 가득 서 있었다. 일제히 나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이 무섭다.

‘털썩!’ 나를 앉히는 거친 손길, 그리고 불시에 시작된 곡소리… 여기는 어디이고 나는 왜 여기  앉아야 하는지, 오는 내내 무표정했던 이모는 왜 갑자기 울기 시작하는 걸까?

두리번거리는 내 눈에 어른들의 표정이 스쳐 지나가다 한 곳에 멈췄다. ‘아빠 사진이 왜 저기 있지?’ 모를 일이다. ‘엄마는? 아빠는? 어디 있지?’

그때 이모 중 한 분이 내게 다가와 서럽게 우셨다. 계속 뭐라고 말씀하시는데 울음소리에 말씀이 잘 이해가 안 된다. 그저 내가 불쌍하단다.

뒤늦게 나타난 엄마의 얼굴도 엉망이다. 고개를 들어 다시 아빠의 사진을 쳐다보니 불현듯 아빠가 없다는 게 실감 났다. 어디에도 아빠는 없었다.

누가 날 툭 쳤을까. 내 안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날 나는 ‘애어른’이 되었다. 더 이상 마음껏 투정을 부릴 수 없는 애어른이.

겨울의 끝자락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날이었다.




슈퍼에서 곧잘 사 먹곤 하던 노란색 둥근 통에 들어있던 ‘커피맛 땅콩’ 냄새가 이상하게도 가득하던 집 안. 지금도 그날의 냄새를 떠올릴 수 있다.


아빠의 흔적 때문에 고통스러운지 이삿짐을 싸는 엄마의 손길이 부산스럽다. 같이 움직여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은 드는데, 이 이상한 ‘커피맛 땅콩냄새’ 때문에 사고가 마비될 지경이다. 콧 속도 부족해 머릿속까지 냄새가 가득 들어찬 것 같았다. 속이 메스껍다. 아무리 해도 사라지지 않는 냄새…

그 뒤로 내가 어디를 가든 냄새가 따라왔다. 코에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 후로도 몇 년을 계속_.


시도 때도 없이 불시에 맡아지는 냄새에 아이들과 대화를 하다가도 ‘멈칫’, 즐겁게 웃다가도 ‘멈칫’, 아빠가 보고 싶어 울다가 잠드는 밤에도 여지없이 냄새를 맡고 순간 경직되곤 했다. 아빠의 죽음을 인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냄새는 계속 됐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각인된 냄새에는 시간을 넘어 과거의 순간으로 바로 이어지는 힘이 있었다. 망각의 방에 갇혔다고 생각했던 기억도 바로 꺼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아빠를 닮았다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행복했다. 이모할머니댁 문턱을 넘어서는 나를 보며 이모할머니가 아빠를 닮았다고 해주셨을 때는 기쁘면서 그립기도 했었다.

나도 모르게 성장하는 어린아이인 내 몸집만큼 그리움도 자기 몸집을 불려 가고 있었다. 사춘기 시작으로 내 안을 들여다보던 나에게 들키기까지 7~8년을 계속 불려 가기만 했었나 보다. 어느새 거대해진 몸집의 그리움에 내 사춘기 시절은 혹독하기만 했다. 그리고 내가 그 그리움을 홀로 소화시키기까지 또 15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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