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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베카 Jan 23. 2024

베이스는 어둑한 회색이 낫겠지.

그 시절의 너를 그리고 있어


화곡동 5층짜리 아파트의 5층에 우리 집이 있었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면 주방 겸 거실이 보인다. 현관문 좌측에 싱크대가 위치하고 그 맞은편이 작은 방이다. 현관에서 보면 대각선에 위치해 주방과 작은 방이 한눈에 보인다. 현관문 우측으로는 미닫이 문이 두 개 달려있는데 그 문을 열면 안방이다.

작은 방은 너무 작았기에 주로 안방에서 잠도 함께 자고 누런 한지에 콩댐을 한 따스한 바닥을 뒹굴거리며 놀았다. 내게는 꽃봉오리 모양의 인형의 집이 있었는데 ‘비밀의 열쇠’를 꽂아서 돌리면 꽃잎이 활짝 피면서 벌어져 내린다. 어린 여자아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법 같은 장난감이었다. 음악과 함께 꽃잎이 벌어지는 모양이 신기해서 한참을 쳐다봐도 질리지 않았다. 거의 유일한 장난감이기도 했다.

어느 날 장난감이 고장 나서 꽃봉오리가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는 기어코 고쳐내었다. 침대에 앉아서 나를 지켜보던 엄마와 아빠가 대단하다며 칭찬을 해주셨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원생이 움직이는 장난감을 고치는 모습이 ‘내 새끼는 천재’라는 부모의 고슴도치 본능을 건드렸나 보다. 나는 그저 내 장난감이 너무 소중했다. 고장 난 장난감을 대신해서 새 장난감이 생기지 않는다는 걸 은연중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장난감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작은 집에 네 가족이 살았지만 좁다고 느끼지도 불행하다 느끼지도 않았었다. 지금은 간절하게 바라는 ‘평범한’ 네 식구의 보금자리였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아빠는 한동안 오지 않다가 나타나기도 했고 엄마는 친구네 엄마처럼 하루종일 집에서 살림을 살지도 않았었다. 아빠도 엄마도 없는 시간을 친구들과 놀거나 동생과 보내기 일쑤였다. 한 번은 엄마 대신 처음으로 쌀을 씻다가 쌀알을 흘려버려 엄청 혼나고 난생처음 반성문이라는 벌도 받았다. 반성문이라는 걸 써본 적이 없던 나를 같이 있는 친구가 도와줘서 간신히 쓸 수 있었다. 9할은 친구의 작문이었다.

유치원을 다니는 어린 나이에 쌀을 씻고 밥을 짓는다는 게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데도 나를 도와 애를 쓰는 친구의 모습에 다른 아이들도 다 하는 일이라고 자연스레 이해하고 넘어갔다. 국민학교 1학년때부터 면실내화를 일주일에 한 번씩 빨아 연탄불 앞에 말리는 것도 내 일이었고, 밥을 지어 동생의 끼니도 함께 챙기는 일 또한 내 일이었다.

억울하게 이웃아주머니에게 혼나도 도와주러 뛰어나오는 엄마는 없었고, 집 앞 아주 작은 마당에 동생과 설레며 밤늦도록 함께 심은 꽃씨들이 옆집아주머니에게 갈아엎어지는데도 우리 편을 들어주며 대신 화내주는 엄마는 없었다.

그뿐이랴 갑자기 비가 오는 날 친구들은 우산을 들고 서있는 엄마들 중에 자기 엄마를 찾아 하나둘씩 집으로 갔는데 결국 어둑한 학교 처마에 나만 끝까지 남아있다가 어쩔 수 없이 비를 쫄딱 맞으며 집으로 뛰어갔다. 빗속에서 엉엉 울며 달려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 우산을 들고 나타나는 엄마는 없었다. ‘혹시나 혹시나’하며 주문처럼 외우던 희망이 꺾여 아무도 없는 불 꺼진 집안을 멍하니 쳐다보며 현관에 서 있다가 이내 체념하고 홀딱 젖은 책가방에서 교과서와 필통을 꺼내 말려두고 터덜터덜 화장실에 가서 젖은 옷을 세탁기에 넣었다. 그때부터 나는 우리 집이 친구 들네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집 안은 싸늘하고 썰렁했다.




국민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 끝자락에 일어난 그 일 때문인데도 어린 나는 현실로 받아들이는데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어린 나이에 짊어질 수 없는 죄책감이 나를 현실에서 밀어내고 있는데 일상은 꾸역꾸역 내게 계속 말을 걸었다. 너희 집은 이미 평범하지 않다고…

국민학교를 다니며 매해 ‘평범하지 않은 이력을 가진 아이’로서 담임선생님들의 개별 면담이 이루어졌었다. 질문은 항상 같았다. “어떻게 아빠가 돌아가셨니?”, “아빠가 돌아가셔서 너는 괜찮니?”였다. 선생님들에게는 안쓰럽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아이였나 보다. 저학년 때는 담임선생님들의 질문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었다. 아빠가 그리워서는 아니었다. 친구들과 있다가 나만 불려 와 썰렁한 교실에 담임선생님과 단 둘이 남아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는 현실이 못내 서러웠었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그저 아빠를 그리워하는 어린아이로 보였나 보다. 괜찮다며 다독이는 손길이 이어졌으니 말이다.

성인이 된 지금은 이런 배려 없는 호의가 폭력이 될 수도 무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시절 그렇게 생각하는 어른은 없었나 보다. 매해 불려 가서 똑같은 질문을 들었으니 말이다. 88 올림픽이 열리던 해이니 지금의 초등학교의 모습을 겹쳐보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상흔이 아물어 없어지기도 전에 헤집어져서 다시 벌어지는 모양새였다. 간절히 누가 나 좀 도와줬으면 하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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