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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베카 Mar 19. 2024

현실의 막장드라마는_아프다

충격과 죄책감사이




 내가 엄마보다 더 키가 자랐을 때즈음 성묘를 가서 마지막으로 소주를 묘에 뿌리며 한 바퀴를 돌 때였다. 소주를 조금씩 비석 앞에서부터 시작해서 비석뒤로 돌아올 때까지 뿌렸는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아빠의 묘가 더 애잔하게 보였었다. 그래서 더 느린 걸음으로 아빠에게 말을 건네며 돌고 있었다. 한 손에는 빈소주잔을 다른 손에는 잡초를 움켜쥐고 비석뒤에 다다른 순간 지금껏 성묘를 가서는 보지 못했던, 아니 인식하지 못했던 이상함에 멈춰 서서 비석 뒤를 스스로 이해가 될 때까지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런 내가 답답해 보였는지 빨리 정리하고 가자는 엄마의 계속된 보챔은 이미 비석뒤에 정신을 빼앗긴 나에게는 닿지 않은 채 맴돌고 있었다. 나의 시선을 잡아둔 것은 비석뒤편에 새겨진 아버지 부인과 자식들의 이름이었다. 이상하게도 우리 이름 말고 이름이 세 개나 더 있었다. 내가 잘못 봤나 싶어 다시 봤지만 정확히 세명의 이름이 더 적혀있는 게 맞았다. 아빠에게 자식이 다섯이 있었던 것이다. 선뜻 무슨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순간 이모들과 외할머니가 흘려가며 한 옛이야기들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름들이 내게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해오고 있었다.




 외할머니와 이모들은 엄마가 어렸을 때 말도 못 할 고집쟁이였다거나 괴팍하기로 동네에서 소문난 이웃 할아버지집에 간 크게도 장난친 일이라던가, 탤런트시험을 봐서 합격한 이야기, 그리고 아빠가 살아계셨던 시절 이야기와 같은 옛이야기를 종종 들려주시고는 했다. 그러다 수다스러운 이모 중 한 분이 아빠와 엄마가 만난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가 회사를 다니면서 같이 일하던 아빠를 만나 내가 생겼는데 당시 유부남이었던 아빠와의 관계가 문제가 되어 호랑이 같던 할아버지의 노여움을 사 결국 아빠가 이혼을 하고서야 엄마와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어린 내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쳐다보니 ’ 아차‘ 싶었었는지 곧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지만 말이다. 당시 엄마에게 사실 확인을 하지는 못했지만 비석뒤의 이름들을 보니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었다. 아빠의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이미 세 자녀가 있었던 것이다.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맞춰지고 나서야, 이 이름들이 무엇이냐고 묻자 내 표정을 보고는 거짓말로 둘러댈 수 없다고 느꼈는지 엄마는 설명 끝에 전부인의 세 아들의 이름이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언성이 높아지고 날이 서더니, 거지 같은 사람들이니 들러붙을 수 있다며 평생 궁금해하지도 말고 절대 찾지도 말라고 고함치듯 당부를 거듭했다. 내가 예상했던 이야기를 확인받는 것의 충격보다 엄마의 이복형제들에 대한 생각을 엿본 게 더 충격적이었던걸 엄마는 알까 싶다. 나의 상식으로는 엄마와 아빠의 결혼이야기는 현실감이 없는 막장드라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있던 나는 몰래 찾아가 멀리서라도 아빠를 닮은 이복오빠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은 열망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아빠가 그렇게 돌아가신 지금 내가 무슨 낯짝으로 이복형제들을 보겠는가. 게다가 그 뒤로 엄마가 한 짓은 그 부인과 자식들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나의존재는

#한가정의파멸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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