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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베카 Mar 26. 2024

유해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버리다

생거진천 사거용인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웠을 때였을거다. 엄마가 갑자기 전화를 해서 아빠의 묘를 없애고 화장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돈문제라면 내가 도우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완강하게 파묘를 해서 화장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엄마의 말에 문제제기를 하거나 반박을 하려 치면 엄마는 단오한 말투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듯이 말하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의 동의나 이해를 구하려고 전화한 게 아니었다. 그저 통보를 하려 했었나 보다.


 이해할 수가 없는 엄마의 기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어느 날 주소를 하나 주며 나를 서울외곽의 어느 야산으로 부르면서 이어졌다. 먼저 도착한 나는 오래전에 버려진 공사자재가 그 역할과 모양새를 잃고 아무렇게나 방치된 폐허와 같은 모습에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온 것 같았다. 한낮인데도 여기저기 자리 잡은 잔해들과 정리되지 않고 아무렇게 자라난 나무와 풀숲으로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몸서리가 처지는 그 상황에 엄마가 도착했다. 입구다운 입구도 없는 야산에서 용케 길을 찾아 들어가기 시작한 엄마가 앞장을 서서 가는데 지나가는 길도 길이라고 부를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더니 뜬금없이 지금까지 한 번도 얘기한 적 없는 아빠의 마지막 유언을 얘기했다. 유언이 화장을 해서 뿌려달라는 거였는데 자신이 유언을 지키지 못해 본인 사업이 이지경으로 힘들어졌다며 사업을 위해 당장 유언대로 해야 한다며 말을 숨 쉴 틈도 없이 토해내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누구도 아닌 아빠에 대한 이야기였다. 유언이 있었다는 것도 20년이 훌쩍 넘는 지금에서야 처음 들었다. 솔직히 설마라는 생각이 컸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고 했다. 하늘로 보낸 가족에게 그보다 좋은 자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유언이 있었다 한들 화장을 해서 뿌려달라는 것이 으스스한 어느 야산에 뿌리라는 이야기는 아니었을 테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우선 본인 혼자 결정할 일도 아니었다. 그 부인과 가족들에게도 알려야 하고 우리의 동의도 얻어야 하는 일이었단 말이다.


 보살 한 분과 스님 한 분이 기거하는 초라한 절에 도착해서야 나는 엄마의 사업에 대한 집착과 스님의 말 한마디로 이런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우선 눈앞에 놓인 상황이 어처구니없었고, 엄마가 나를 불러낸 이유가 어이없었다. 엄마는 이미 묏자리를 없애고 유해를 이 야산에 뿌리려고 나를 부른 것이었다. 아마 나만 부른 것도 대화를 들어보니 스님의  요구사항이었던 것 같다. 몰아치듯 급히 진행되는 일에 점점 현실감을 잃었고, 앞장서는 스님의 뒤를 아빠의 유해를 들고 따르는 모습 자체가 기이하게 느껴졌다. 무언가 잘못돼도 한참이나 잘못된 일인데 누구 하나 이상하다고 느끼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빠를 이렇게 보낼 수 없어 따라가는 발걸음에 눈물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길도 없는 야산의 풀숲을 손으로 헤집으며 깊고 또 깊은 곳을 들어가더니 엄마는 스님이 손가락질하는 곳에 아빠의 유해를 거침없이 뿌렸다. 전망이랄 것도 없고 눈에 띄는 나무나 바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방이 아무렇게나 자란 나무와 풀숲으로 이어져 방향감각도 잃을 것 같은 허망한 곳에 아빠의 유해가 바람에 날리며 푸른 잎사귀와 젖은 흙에 내려앉았다.


 나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장면에 정신을 놓았다가, 아빠의 유해를 뿌리자마자 간단한 기도문 같은 걸 외고는 뒤돌아서 다시 내려가겠다는 스님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아빠가 뿌려진 자리에 있던 가냘픈 나뭇가지에 서둘러 가지고 있던 묵주를 걸었다. 예의 이상한 예감에 차에 있던 묵주를 쥐고 내렸는데 이렇게 쓰이다니!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엄마는 계속 아빠의 유언이었으니 잘된 일이라고 했지만. 나는 두 번 다시 찾아올 수 없는 곳에 아빠를 ‘버리고’ 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나면 오히려 목소리가 가라앉고 차갑게 식어가는 이성을 느끼고는 했는데 이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굳어버린 나를 향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엄마에게 ‘엄마가 돌아가시면 아빠처럼 여기에 뿌려줄게’라고 말했다. 그 순간 엄마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차마 스님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는 모양인지 눈빛으로 전하느라 흉흉한 냉기가 돌았다. 본인은 그렇게 화가 날 정도로 싫은 일을 왜 아빠에게 한단 말인가! 난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그만큼의 슬픔으로 숨도 쉬기 어려웠다. 절대 내가, 또는 어느 누구라도 찾아올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차마 아빠를 이대로 두고 갈 수가 없어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던지. 한참을 망설이며 흩어진 아빠의 유해를 쳐다보다가 그 자리에 두 손을 쥐고 앉아 아빠에게 죄송하다며 기도를 드렸다.


 첫 번째 헤어짐도 두 번째 헤어짐도 그저 죄송한 일뿐이다. 내가 아빠의 심부름을 하지 말걸. 내가 엄마를 이겨볼걸. 악을 쓰고 매달려서라도, 아니면 아빠의 유골을 본 순간 들고 도망이라도 갈걸.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빠를 그리워할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죄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시원하다는 듯이 스님과 절에서 담소를 나누는데 여느 평범한 날의 마실이라도 되는 냥 평화로웠다. 반면 내 안에서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 질책을 가하며 죄책감으로 폭발하는 중이었다. 근데 저 둘은 저렇게 평화롭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명절이 돌아오면, 아빠생신이 다가오면, 봄이 찾아올 겨울끝자락이 되면 아빠가 보고 싶다. 그런데 갈 곳이 없다. 아빠에게 꽃 한 송이 건넬 곳이 없다. 용서를 제대로 빌 수 없어 더 무거워지는 죄책감만 내 안에 자리하고 있다.






#모든게내탓이다

#결국그누구도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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