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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정 May 02. 2024

이별할 준비


스무 살, 그해 햇살 쨍한 겨울의 어느 날, 엄마 대신 나를 키워주셨던 외할머니가 떠나셨다. 나는 할머니 가는 길을 배웅하지 못했다. 시험기간이라서랄지, 먼 거리라서랄지 여러 핑계를 대 보지만 그때 왜 가지 못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식도암이셨다. 암을 발견했을 당시엔 말기까지 진행된 상태였고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일생을 밭으로 논으로 종종 거리고 다니시면서 한량이신 할아버지 몫까지 일하시느라 고생만 하셨는데 죽음마저도 쉽지 않았다. 종합병원에 입원해 계시다가 더 이상 입원이 무의미하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는 퇴원하셨다고 엄마에게 전해 들었다. 할머니의 암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냥 무덤덤했다. 할머니의 죽음이 목전이라는 것이 실감이 안 났다. 멀리서 학교를 다닌다는 이유로 병원을 가기를 피하기만 했다. 할머니를 뵈야겠다는 용기를 낸 건 할머니 돌아가시기 며칠 전이었다.


내 모든 어린 시절 담겨 있는 할머니 집. 방문을 열었다. 항상 할아버지 자리였던 아랫목에 할머니가 누워계셨다. 식도암은 잔인하게도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상태로 할머니를 만들어 버렸고 주삿바늘 하나에 삶을 연명하고 있는 할머니는 앙상한 뼈만 남아있었다. 죽음의 그늘이 너무 짙었다. 나를 한번 스쳐보시던 눈이 공허했다. 지난날 내내 끼고 살면서 예뻐하던 나를 알아보시지 못하셨다. 내가 너무 늦었다. 그날의 낯선 할머니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고통으로 많이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건네 들었지만 다시 할머니를 찾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할머니가 눈을 감으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얼마 안 있어 많이 아팠더랬다. 온몸이 너무 아파 며칠을 열에 들떠 잠들고 깨어나기를 반복하던 그때 할머니가 찾아오셨다. 그 밤 문 앞에 오신 할머니를 어서 들어오라고 반겨 주지 못했다. 많이 힘드셨을 할머니 손 한번 잡아드리지 못한 마음의 짐은 한없이 무거워 할머니에게 맘 놓고 안기지도 못하고 외면해 버렸다. 이후 할머니는 내가 아플 때면 꿈으로 찾아오셨다. 그냥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다 가시곤 했다. 할머니와 제대로 된 이별을 하지 못한 나는 꿈속의 할머니를 본 날이면 서러운 눈물을 쏟으며 깨어났다.


누군가와의 좋은 기억 하나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등불이 되어 준다고 들었다. 밭두렁에 앉아 혼자 놀고 있는 나를 시시 때때로 바라보던 웃음 가득한 눈길, 참외하나 톡 따서 바지에 쓱쓱 문질러 건네주시던 투박한 손길, 잠자리에 들 때면 품속에 꼭 안아 재워주던 따뜻한 숨결. 언제나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던 그 수많은 기억들이 어린 나를 키웠고 여전히 지금의 나를 키우고 있다.


오랜만에 꿈에 할머니가 오셨다. 아프지도 않은 나를 찾아오셨다. 할머니를 만날 때면, 할머니가 떠나신 그 해 겨울로 돌아가 배은망덕한 나 자신을 향한 배신감으로 쭈뼛거리는 나를 또 말없이 바라보고 계셨다. 이제는 그만 그 넓은 품에 안기고 싶다. 다 컸는데도 안아 재워 주시던 그 숨결을 슬픔이 아닌 기쁨으로 추억하고 싶다. 많이 보고 싶다고,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드리고 싶다.


잠에서 깨어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딸아이에게 엄마의 할머니 이야기를 해줬다.

“엄마가 할머니한테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아니 엄마가 할머니를 많이 사랑했는데 꿈에 오셔서.. 너무 보고 싶어서.. 눈물이 자꾸 나네..”

너를 사랑하는 법을 할머니에게 배웠단다.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할머니가 가르쳐주셨단다. 할머니와의 수많은 기억을 하나하나 딸아이에게 들려줘야겠다. 그리고, 할머니가 다시 찾아오면 꾹 다물던 입을 열어 못다 한 말들을 다 전해줘야겠다. 이번엔 제대로 된 이별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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