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를 생각하지 않은 이유
아침에 약 먹다가 진료예약일이 언제였는지 떠올렸다. 전혀 기억 안 났다. 메모에도 달력에도 없었다. 서랍을 뒤져 약 봉투를 찾고서야 거기 써진 다음 예약일이 5월 30일인 걸 알았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약 날짜와 시간은 핸드폰 메인화면 투두리스트 위젯에 한번, 캘린더 위젯에 또 한 번, 마지막으로 다이어리에도 한번 적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어디에도 적지 않았다. 다행히 알아낸 예약 날짜와 시간이 여전히 낯설다.
ADHD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지 꽤나 오래되었다. 이 문장 뒤에 아주 많은 말을 적고 지우고 다시 쓰다가, ADHD에 대해 회피하고 싶었다는 말로 간단히 정리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치료가 잘 되어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정신과를 오래 다니다가 ADHD로 방향을 튼 지는 벌써 1년이다. 약 용량을 늘리고 처음에는 정리가 잘 되어가는 듯싶더니 다시 예전 나로 돌아갔다. 콘서타를 63으로 올렸다가 다시 54로 내려서 그런가. 날 잡고 몇 시간을 들여 정리하는 건 할 수 있는데, 그걸 반나절 이상 유지하는 게 안 된다. 책꽂이 3칸이 빽빽한데 어떤 자료가 필요할 때마다 그게 나한테 있긴 한지, 있어도 대체 어디 꽂혀있는지를 몰라 무조건 다시 인쇄한다.
우선순위를 제대로 정하지 못하는 것과 더불어 충동성이 여전히 높은 것 같다. 그리고 미룬다. 끈기도 없다. 어떤 날에는 ADHD책에 나온 포괄실행목록을 쭉 써보고는, 그 안에서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분류했다. 그리고 긴급도와 중요도를 고려해 실제 실행할 일의 목록과 우선순위를 정하고 소요시간을 예측해 봤다. 대략 7가지의 할 일이 정리되었다. 그리고 2갠가 실행하고는 내가 그것들을 정리하고 하기로 했던 사실 자체를 잊었다.
요즘 다시 너무 졸리다. 이게 정말 당황스럽고 서럽다. 체면 차리고 예의 갖춰야 할 상황일 때도 참을 수 없이 졸리다. 잠을 더 자고 덜 자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해낸다고 해서 달리 플러스가 되진 않지만 안 하면 마이너스가 되는 일상의 그 모든 사소한 과정들이 다시 버거워졌다.
지쳤나. 우울증인가. 단지 게으른가. 노력을 안 했나. 어쩌면 내가 치열히 고민하고 이미 결론 내렸어야 할 물음들이 따라붙는다. 그래 당연히, 조금은 지쳤겠고, 조금은 우울할 수도 있고, 어느 정도는 게으른 게 맞고, 노력도 최선이 아니었을 테지만... 끝맺을 말이 나도 모르게 꽁꽁 숨어버렸다.
ADHD 치료제를 안경에 비유하는 말을 본 적이 있다. 이제 와 느끼는 점은, 그 안경이 세상을 선명히 보게 해주는 동시에 거울에 비친 내 모습도 여과 없이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내가 모르던 잡티까지도 볼 수 있게 돼서 완벽히 커버할 수 있다면 그게 나쁜 일은 아니다.
지금 나는 안경이 벗겨진 것 같다. 전에 써봐서 잡티가 있다는 건 안다. 그런데 안경이 없어 잡티가 정확히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모르고 능숙히 가릴 수도 없다. 그게 내가 거울을 피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