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마 Aug 23. 2024

아토목세틴도 먹게 될 줄 몰랐다

성인 ADHD 약물치료 16개월 차에 아토목세틴 처음 처방받은 후기 


난 내가 ADHD 치료의 큰 산을 죄다 넘은 줄 알았다. 이제 그냥 슬렁슬렁 먹던 약 계속 먹다 보면 갈수록 더 나아질 일밖엔 없으리라고... 그렇게 믿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누구도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고 딱히 근거도 없었는데 그냥 어쩐지 그럴 거 같아서 나도 모르게 굳게 믿었다.


그리고 오늘 약이 바뀌었다. 콘서타가 줄고 아토목세틴이 추가됐다. 데스크에서 약을 받아 드는데... 약 뭉치에 못 보던 파란색이 보여서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약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아. 치료 16개월 차에도 약이 바뀔 수가 있구나. 난 끝난 게 아니구나... 어쩌면 이제 또 시작일 수도 있겠구나. 


근데... 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속상할까??????


더 슬픈 일이 생겼다고 거짓말로 둘러대고 누구한테고 전화해 펑펑 울고 싶을 정도로, 드물게 감정이 북받쳤다. 내가 지금보다 아주 많이 작고 아주 많이 어렸으면, 아따아따 단비처럼 드러누워 땡깡을 부릴 수 있었을 텐데... 언제 어디서든 맘껏 울 수 있는 건 어린아이의 특권인 것 같다. 혹여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면 원 없이 울어야지.




약이 조정된 배경은 이러하다.


사실은 지금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그래 이게 가장 근본적인 내 문제다), 근래에 확연한 변화가 있었다. 너무 졸렸다. 그래서 너무 많이 잤다. 잠으로 이미 한껏 고생한 수년의 기억을 들춰봐도 유례없을 만큼 심하게 졸려서 말도 안 되게 많이 잤다. 한 달가량의 단기 알바가 8월 중순경 끝났는데 그 이후로 거의 기억이 없다. 체력을 크게 요하는 일이긴 했지만 그걸 다 감안해도 한 3일쯤 쉬면 정상 컨디션으로 얼추 돌아와야만 납득이 되는데, 그러질 못했다.


약 열흘간 하루 중 깨어있는 시간이 8시간도 채 안 됐던 것 같다. 혹시 내가 새롭게 기면증 따위의 병에 걸린 건 아닐까 검색해 봤을 정도다. 이전 삶을 돌이켜보면, 아무리 피로가 누적돼 잠을 몰아서 자게 되더라도 밤잠을 많이 자고 나면 낮에는 그럭저럭 깨어 있었는데... 이번엔 그냥 정말 말 그대로 하루종일 졸렸다.


하루 패턴이 대략 이러했다. 밤 9시쯤 되면 이미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그래서 누우면 10시 전후로 잠들었고 6시 전후로 깼다. 처음 깰 땐 그래도 개운했다. 그래서 아침 먹고 약 먹고 하루를 시작하려고 하면, 정말 거짓말처럼 약 먹고 1시간쯤 지났을 때마다 극심한 졸음이 몰려왔다. 질 게 뻔해서 어떻게 이겨볼 마음도 안 생기는 그런 막강한 졸음... 그래서 8시쯤 다시 잠들면 11시 전후에 깼다. 이때 약간의 활동을 하다가도 다시 두어 시간 지나면 너무 졸렸다. 서서히 졸린 것도 아니고 갑자기 전원이 꺼지듯 확 졸린 순간이 오는데 마찬가지로 정말 이겨볼 엄두가 안 나는 그런 졸음... 이런 식으로 밤에 8시간 이상 꼬박 자고도 수 차례 계속 잠들었다.


집에 있어서 졸린가 싶어 밖에 나가면... 그래도 졸렸다. 사람을 앞에 두고도 예의를 갖출 수 없을 만큼 졸렸다. 공공장소에서도 어디 몸 누일 곳만 보이면 내가 못 참고 저기 벌러덩 누워버리지 않길 기도해야 할 만큼 졸렸다. 


오늘 진료를 기다리면서 화장실에 갔다 왔는데, 화장실에서 병원 입구까지가 직진이었다. 그 쭉 뻗은 길을 걸어오면서 나도 모르게 눈을 감는 걸 느꼈다. 이유는 졸려서. 그러고 보면 이 정도로 알뜰살뜰히 짬짬이 수면을 보충하는 일이 최근에는 예삿일이었다. 예를 들면 파일 다운로드를 기다리면서 그 몇 초 되지도 않는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있는다거나... 




그리고 또 하나. 기억력이 온전치 못하다. 정확히는 일화기억(episodic memory)에 한해서 그런 것 같긴 하다. 그러니까, 누구랑 무슨 얘기를 했는지, 누구랑 뭘 했는지, 어디에 갔는지... 이런 걸 너무 까먹어서 인간관계에 약간의 지장이 생겼다.


예를 들면, 최근 새로 인연이 닿은 누군가에게 생일을 물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상대방한테서, 혹시 우리 사이 있었던 일 다 잊은 거냐고 반쯤은 장난스럽고 반쯤은 서운한 듯한 반응이 돌아왔다. 나는 그때도 정말 기억이 안 나서, 술 먹고 얘기했었냐고 되물었지만... 상대 말에 따르면 맨 정신에 서로 생일을 알려줬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친구랑 카톡을 하다가 방금 족발 먹었다고 사진 찍어 보냈는데... 그 친구가 방금까지 나랑 족발 먹던 친구였다. 셋이 먹다가 한 명이 일 있어서 먼저 간 건데, 처음부터 그 애가 없었던 것처럼, 같이 먹은 걸 아예 까먹은 거다. 이 일이 지금도 너무너무너무 미안하다. 다음에 만나면 차라리 몇 대 때려달라고 해야겠다...


이런 일이, 서로 간에 일어났기에 공유되어야 할 기억이 오직 상대에게만 남아있고 내겐 흔적 없이 사라져 있는 일이, 어쩔 땐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 나는 의도치 않게 무심한 사람이 되어 자꾸만 변명을 늘어놔야 했다. 사실 그들의 상한 마음보다도 더 크게 타격을 입은 건 나였다. 기억과 애정의 상관관계 따위를 가늠하며, 정말 내가 관심이 없고 애정이 없어서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헤아려볼 때마다, 어쩐지 내가 상처받는 기분이 들었다.




의사 선생님은 콘서타 용량을 최근에 줄여서 그럴 수 있겠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63에서 54로 줄이긴 했다. 언제쯤 줄이기 시작해서 얼마동안 54를 복용했는지를 잘 모르겠다. 최근 난 이 정도로 내 ADHD 치료에 관심이 없었다. 업보인가?


아토목세틴은 콘서타랑 다른 계열의 약이라고 하는데, 굳이 따로 검색해보진 않았다. 괜히 화려한 부작용 리스트를 접했다가 그냥 지나갈 증상도 크게 느끼게 될까 봐... 솔직히 귀찮아서도 있다. 이 약이 어떤 약인지보다 내가 먹었을 때 어떤지가 더 중요한데, 그건 최소 몇 주 먹어봐야 알 테니까. 어쩌면 꼭 필요한 정보도 아닌 것이다. 이제 치료를 위해 노력하고 싶지 않다. 노력으로 인정해 줘야 될지 고민될 정도의 간당간당한 에너지만 투자할 거다.


아무튼 그래서 한 달 동안 내가 먹을 약은 다음과 같다.


<아침 식후>
인데놀정 20mg(40mg 반 알)
콘서타서방정 36mg
환인아토목세틴캡슐 25mg(NEW!)

<저녁 식후>
아빌리파이정 1mg(2mg 반 알)
에프람정 20mg


난 그렇게... 큰걸 바라며 사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제발 그냥저냥 살았음 좋겠다. 그럭저럭 살만한 상태로, 너무 애쓰지 않아도 살아지는 그런 상태로 살 수 있었음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집중력이 좋아도 ADHD일 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