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나는 파리의 마트에서 오늘을 샀다

우리의 여행은 장바구니로 남았다

by 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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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파리로 넘어오자, 도시의 결이 달라졌다.
속도도, 빛도, 냄새도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물가는 더 저렴했고, 덕분에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우리는 파리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거의 매일 마트에 들렀다.
장을 본다는 건, 그 도시의 일상에 잠시 들어가 보는 일이니까.


작은 장바구니를 들고 마트 안을 돌 때면
매대에 쌓인 빵과 과일, 푸딩과 치즈들이 말을 걸어왔다.


빵은 먼저 냄새로 말을 걸었고,
치즈는 냉장 진열대 한편에서 오래된 친구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푸딩은 말없이 빛났다.
꺼내 들기만 해도 오늘 하루가 더 부드러워질 것 같았다.


마트 한가운데엔 착즙 주스 기계가 있었다.

투명한 유리 안에서 오렌지가 반으로 갈라지고,
즙이 뚝뚝 떨어지며 병 하나를 채우는 순간,
엄마는 아이처럼 좋아하며 말했다.
“이거 너무 신기하지 않니?”
그 말이 웃음처럼 퍼져서, 우리는 매일 주스를 샀다.
파리의 아침은 그렇게 상큼하게 시작되곤 했다.


파리의 마트는 물건을 파는 곳이라기보단,
‘하루를 고르는 공간’에 가까웠다.
무엇을 먹고 싶은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어떤 하루를 살고 싶은지를 고르는 기분이었다.


바게트를 한 줄, 푸딩 두 개, 오렌지 주스 한 병.
그날의 기분과 취향을 담아 봉투를 채우면
마치 작은 삶 하나가 완성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걸 들고 나와 햇살 아래 걷는 순간은,
작은 피크닉이 되었고,
파리에서의 또 하나의 소중한 페이지가 되었다.

여행 마지막 날, 엄마가 말했다.


“그 도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마트였어.”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념품보다 오래 남을 어떤 기억이
우리가 들고 다닌 장바구니 속에 담겨 있었던 것 같았다.


우리는 파리에서 특별한 관광지가 아닌,
평범한 마트에서
가장 따뜻한 ‘오늘’을 골라 담았다.

부스럭대는 장바구니 속에서
알 수 없는 기분이 익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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