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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로 Nov 23. 2023

쉼없었던 직장생활, 잠시 쉬어갈게요

희망퇴직이란 걸 하기로 했다

   

구직급여 신청과 이력서 업로드 등을 준비하다 보니 그간 직장생활이 20년이 넘었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건강보험 가입이력을 기본으로 간편인증을 통해 직장 이력이 한 번에 조회되었다. 이직을 하는 사이사이에도 쉬었던 기간이 없으니, 대학 졸업부터 40대 중반에 이르는 오늘까지 아주 깔끔한 이력이었다. 초중고 졸업, 대학 졸업하면서 바로 취업. 열심히 살았다 싶다. 덕분에 구직급여는 8개월이나 지급된단다.

      

대학생이었을 때 나는 우리 과에서 절반 정도는 휴직하고 사라지던 해외어학연수는 꿈도 못 꾸었고, 오로지 취업을 위한 프로젝트, 공모전에 열중했고, 그 당시 기본 중에 기본이었던 토익시험, 컴퓨터활용능력시험 등 자격증 취득에 열심이었다. 큰돈은 아니어도 용돈은 벌었어야 하므로, 소소하게나마 장학금이 지급되는 학교 동아리 활동에 자원했고, 학생 개인과외, 학원 보조선생, 논문문서입력, 논술첨삭, 고속도로 버스전용차로 위반차량 단속(그 당시 도입 초기여서 고속버스를 타고 위반차량을 마치 카파라치처럼 단속했음), 졸업식 꽃장사 등 대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들을 경험했다. 

스스로 찾아서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친구와 추억도 쌓았기에 이제는 소중한 추억들이다. 특히 논술첨삭 알바는 우리 가족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고3 수험생이 학원에 제출한 논술원고를 받아와서 밤새 빨간펜 첨삭을 하고 다음 날 수험생이 학원에 오기 전에 다시 갖다 주는 일이었다. 장당 3~4만 원 정도 받았을 텐데, 3주 정도 밤샘 일을 한 결과로 모은 약 500만 원의 돈을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 마련 계약금으로 사용했기에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기도 하다. 그때 참 열심히 생활했다 싶다.      


대학을 졸업하면서는 당연히 취업을 해야 했다. 대기업에서 20대, 30대 청춘을 바치시고, 지속되는 박봉을 견디며 30여 년을 한 회사를 다녔지만 승승장구 승진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IMF 금융위기 시절 집에서 왕복 서너 시간 걸리는 먼 곳으로의 발령을 감수하면서도 자녀들의 대학졸업을 위해 정년까지 버티고 버티셨던 내 아버지가 어깨에 짊어진 무게를 덜어드려야 했다.    

  

아버지가 정년퇴직을 하셨던 5월의 어느 날, 식탁에 앉아서 둘이 소주잔을 기울이던 날이 있었다. 그때 난 직장생활 1년 차였고, 어쭙잖게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책을 한 번에 읽어내며 역사 속 민족의 고통을 그대로 느껴내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한강」에서 말하는 시대를 내 아버지가 그대로 겪어냈음을 너무 몰랐던 무식하고 무심한 딸이었다. 그때 책 내용을 아는 척하다가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내색하지 않고 직장생활을 하던 아버지,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어려움을 온몸으로 받아내셨던 아버지,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면서도 자식들 공부를 최우선으로 여기며 서울 강남 한가운데에서 살아보겠다고 애쓰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느끼며 소주 한 잔에 타들어가는 가슴과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방울이 2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선하다.      


그렇게 나의 사회초년생 시절은 아버지의 정년퇴직과 함께 했기에, 얼마 안 되는 급여를 받을지라도 나는 우리 집의 경제적 가장이어야 했다. IMF 위기와 함께 했던 시기였기에 ‘취업’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졸업을 앞둔 한 달 전 겨우 벤처회사에 취업할 수 있었다. 당장 취업이 중요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 달 월급 80만 원. 3개월은 수습이고, 수습 이후에는 100만 원 준다 했든가...... 당시 나에게는 대표님이 심어주는 비전보다는 월급이 정말 중요했기 때문에 첫회사의 비전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 3개월도 채 다니지 못하고 다시 시도했고, 나의 20년 이상을 함께 하게 된 업종에서 신입사원으로 다시 시작했다. 지금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아 20년 전 은행거래 목록을 살펴보니, 200만 원도 되지 않는 월급에서 절반 정도는 매달 부모님께 송금해 드렸었더라.... 뒤돌아보며 생각하니 힘들었을 수는 있지만 나쁜 기억은 아니더라.... 


그 뒤에도 2번의 이직을 했고, 그때와 올해 희망퇴직이라는 아름다운 말로 퇴직을 결정했을 때 아버지는 ‘좀 더 다니지’, ‘버티지’라며 조심스럽게 말씀을 하시며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표현하셨다. 나는 아버지 때와는 시대적 상황이 다르다며, 버틴다고 버텨지는 시대가 아니라고 설명드리며, 이것이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시작이니 지켜봐 달라고 말씀드렸다.  

햇살이 내리쬐던 따뜻한 가을 한 낮. 모처럼 점심식사를 함께 한 후, 따뜻한 날씨를 핑계 삼아 동네 공원에서 커피 한 잔을 하며 아버지 어머니께 나의 결정을 말씀드리며 눈물이 났다. 아마도 내 눈이 햇살과 인사했기 때문이었다고 웃으며 마무리해 본다.

             


아무 말 없이 등을 토닥여주신 아버지. 

이제 좀 쉬어도 된다며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보여주신 어머니. 

고맙습니다!

전 잠시만 쉬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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