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퇴직이란 걸 하기로 했다
퇴직 2달에 접어드는 연말이었다. 회사를 다녔더라면 송년회 준비에 조금은 들썩였을 거였다. 들리는 소리에 따르면 그 회사는 12월 초 여느 때처럼 송년회를 준비하며 전문사회자를 섭외하여 좀 더 들뜨는 분위기를 만들거라 했다. 작년 송년회 때 큰 반향을 일으켰던 직원 장기자랑을 또 기획했으나, 젊은 친구들이 자원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부서장급들이 나서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회사 창립 이래로 첫 희망퇴직이란 게 있었던 해이다 보니, 그 흔적을 지우고 새 마음 새 뜻으로 잘해보자는 의도도 깔려있을 거라 추측도 해보았다.
조용히 연말을 맞이하고 있다 보니, 나뿐만 아니라 갑자기 퇴직을 선택해야만 했던 동료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사람에 대해서, 동료들에 대해서 나쁜 감정은 하나 없었던 나로서는 그저 너무 급했던 퇴사가 아쉬웠고, 큰 결정 이후 다들 어찌 살고 있는지 감정적으로 현실적으로 궁금했다. 이제는 조직에 속해 있지 않기에 가만히 있다가는 송년회도 없이 이 시점이 지나갈 거라는 서운함도 있었다.
이런 마음에, 많지는 않지만 몇몇 퇴사동기들이 소집된 오픈채팅방을 통해 우리들만의 송년회를 가져보자는 의견을 말하고 싶어졌다. 다만 아무도 호응을 안 하면 정말 민망할 것 같아, 꼭 와줄 것 같은 분께 개인톡으로 연락을 드렸다. 오랜만에 만나 밥 한 끼 하자는 뜻을 비추었더니 선뜻 참여하시겠다고 해주신다. (고마운 분!)
용기를 내어 단톡방에 송년회 소식을 알렸다. 참여자가 많을 거란 예상은 하지 않았기에(더욱이 단톡 공지이다 보니...) 세 분이 연말 개인스케줄로 함께 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셨고, 네 분이 참여하시겠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정말 고마운 분들!)
그리고, 마침내 당일이 되었다. 그새 백수 생활에 익숙해져서인지 집에 머물다가 오후 늦게 외출한다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오랜만에 뵐 분들, 밥 한 끼 제대로 못하고 이별 아닌 이별을 했던 분들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렘에 발걸음을 옮겼다.
맥주 한 모금, 안주 한 입과 함께 딱 지금 우리끼리이기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 구직급여와 공모주와 중고물품 거래로 얻는 수익으로 당분간 생활비를 지원할 거라는 이야기
> 정년을 얼마 안 남기고 그만두었으니 바로 연금을 수령한다는 이야기
> 건강보험 지역가입자로 전환되었으나 재산이 없어서 생각보다 보험료가 많이 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
> 오랜 금융사 경험을 살려 은행에 재취업을 시도했으나 나이 때문에 이미 거절당했다는 이야기
> 이력서만 내면 최소한 면접 연락은 올 것 같은데도 연락이 없어 나이 때문인 것 같다는 이야기
> 가까운 친척들이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어 상의해 보았으나 24시간 노동력을 갈아 넣어야 한다는 이야기
> 지금 취득하여 활용할 수 있는 자격증이나 활용성 높은 교육에 대한 이야기
> 한 달 동안은 겨울의 진수 스키장만 오갈 거라는 이야기
> 회사 다니는 동안 소홀했던 자녀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단 둘만의 해외여행을 간다는 이야기
> 갑자기 생긴 큰돈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
> 새벽까지 공예 취미를 즐기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이야기
> 그리고, 따로 소식을 나누고 있는 다른 퇴사동기들의 근황
대부분 현실에 긍정적이지만은 않았고 웃픈 에피소드들이었다. 직장생활이 뭐 그렇게 바빴는지 월급 이외에 재산은 없고, 가족들과 보낸 시간이 부족했다. 세상 물정이 어두워 자영업 실상은 잘 모르고, 나이만 먹었지 기술은 없었다.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알았으니 서글픔을 회복하고 인생을 즐길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나름대로의 희망과 웃음은 있었다.
따뜻한 차 한 잔씩 함께 하고, 귀가를 위해 뿔뿔이 흩어지는 그 시간에 눈이 펑펑 내렸다. 아마 또 있을 것 같지 않은 '퇴사동기 송년회'를 잘 기억하라는 뜻이었지 않았을까. 잊지 못할 것 같다.
만나주시겠냐는 내 손을 잡아준 분!
인생 선배로서 따뜻한 말 건네준 분!
다음을 기약하지 않았지만 다시 볼 때 정말 많이 반가울 것 같은 분!
나에게 직장은 없지만, 사람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