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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벽 앞에 섰던 스무 살

멈출 수 없었기에

by 달빛서재

내 손에 들린 지도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새하얀 백지라는 것을 깨달은 뒤에도, 시간은 나를 위해 잠시도 멈춰주지 않았다. 나는 어느덧 스무 살이 되었고, 어른의 세계라는 낯선 바다로 떠밀리듯 위태로운 첫발을 내디뎌야만 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의 나는 가난이라는 현실의 무게를 느끼기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뜨거운 열망으로 더 가득 차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한 열정은 있었지만, 그 마음을 들고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지금처럼 국가장학금 같은 든든한 제도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대학이라는 곳은 감히 꿈꿀 수조차 없는 먼 세상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내 몸 하나로 기술을 익혀 단단한 전문가가 되는 길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 길 위에서 꿈과 현실은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회사를 다녀야만 기술을 배울 학원비를 벌 수 있었고, 기술을 배워야만 이 팍팍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퇴근 후 몰려오는 고단함도 잊은 채 매일 밤 학원으로 향했다. 때로는 새벽반 수업을 듣기 위해 남들보다 하루를 더 일찍, 캄캄한 어둠 속에서 시작해야 했다.


실력만이 유일한 지도였던 길


내 주변에는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 방향을 알려주는 어른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수많은 정보들 속에서 방향을 잃은 작은 배처럼 막막하게 헤맸다.


그러다 정말 우연히 ‘금형설계’라는 낯선 분야를 알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보다, 오직 실력 하나로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그 말이 내 마음을 강하게 붙잡았다. 어쩌면 이것이 학벌이라는 배경 없이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거다.’


나는 망설임 없이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험난한 터널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붕어빵 틀에서 시작된 나의 세계


금형설계는 쉽게 말해 ‘붕어빵 틀’을 만드는 과정과 아주 비슷했다. 맛있는 붕어빵을 많이 만들려면, 먼저 정교한 붕어 모양의 틀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쓰는 모든 공산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그 제품의 모양을 찍어낼 수 있는 단단한 금속 틀, 즉 ‘금형’이 필요했다.


스마트폰 케이스부터 자동차 부품까지, 이 세상의 수많은 제품들이 바로 이 금형을 통해 태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분야라면, 나의 노력과 실력만으로 세상에 단단히 발붙이고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화장품 케이스를 만드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 시절,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심은하의 광고로 모든 여성의 마음을 흔들었던 유명한 립스틱 케이스를 만들던 곳이었다. 반짝이는 제품들을 보며, 나도 드디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세상의 일부가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왕복 네 시간의 약속


하지만 현실은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회사는 상계동 집에서 무려 두 시간이나 걸리는 김포에 있었다. 지금이야 모든 것이 발전한 도시가 되었지만, 그때의 김포는 5일장이 서기도 하는 정겨운 시골의 풍경이었다.


교통편도 좋지 않아, 나는 매일 새벽 첫차를 타기 위해 졸린 눈을 비비며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달려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회사 통근버스로 갈아타고서야 겨우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왕복 네 시간의 고된 여정. 지금 생각하면 참 무식하게 버텼던 날들이었다. 생산직 직원을 포함해 100명 가까이 되는 회사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나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분들이 나를 유난히 예뻐해 주셨다. 먼 길을 오가는 고단함도, 회사에 가면 마음 편히 맞아주는 동료들 덕분에 녹아내리곤 했다.


새롭게 배우는 설계는 재미있었지만, 3차원의 복잡한 형상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수시로 현장을 찾아갔다. 시끄러운 기계 소리 사이를 오가며, 어떻게 하면 현장 사람들이 조금 더 쉽고 편하게 가공할 수 있을지 묻고 또 물었다. 책상 위 도면과 현장의 손길이 만날 때 진짜 기술이 탄생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배우던 시절이었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스무 살의 열정은 지칠 줄을 몰랐다. 퇴근 후에는 영어학원에 들러 꾸벅꾸벅 졸면서도 단어를 외웠다. 오늘 배운 이 단어 하나가, 언젠가 나를 더 넓은 세상으로 데려다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서였다.


그렇게 치열했던 회사 생활은, 큰아이를 임신하면서 자연스럽게 막을 내렸다. 스무 살의 나는 여전히 내가 무엇을 가장 잘하는지, 최종적으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나는 여기서 멈출 수가 없었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몰라도, 오늘 하루를 걷지 않으면 내일의 나는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왕복 네 시간의 거리는, 나의 스무 살이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치열한 약속과도 같았다. 세상의 벽 앞에 섰던 스무 살의 나는, 결코 멈추지 않았고 그 하루하루가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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