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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엄마와 무수리 딸

엄마의 세상 나의 세상

by 달빛서재

친정 식구들은 가끔 엄마를 ‘공주님’이라 불렀다. 그럴 때면 나는 남몰래 나 자신을 ‘무수리’라고 불렀다.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던 음식은 ‘내가 해준 잡채’였다.


엄마는 종종 말씀하셨다. “네가 해준 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고, 너희 집에서 살았던 그 몇 년이 내 평생 가장 행복했다.”라고. 그 말을 들으면 딸로서 기쁘면서도 마음 한쪽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참 이상하게도, 내 기억 속에는 엄마가 나를 위해 차려주신 따뜻한 밥상 하나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엄마는 억척스러운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6.25 전쟁 통에도 굶어본 적 없이, 피난길에도 쌀 포대를 깔고 앉아 책을 읽었다던, 참 곱게 자란 분이었다.


이모는 약사가 되셨고 외삼촌은 선생님이 되셨다. 모두가 그렇게 반듯하고 탄탄한 길을 걸었다. 하지만 아빠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엄마는 평생을 기댈 줄만 알았던 온실 밖, 거친 들판에 홀로 서게 되었다. 그런 엄마 곁에서, 나는 스스로 억척스러운 ‘무수리’가 되어야만 했다. 엄마가 채워주지 못하는 세상의 단단함을, 내가 채워야 했다.


서툴렀던 사랑의 언어


어린 마음에 엄마를 향한 서운함이 파도처럼 밀려오곤 했다. TV 속 드라마에 나오는 6남매의 엄마처럼, 떡을 팔면서 자식들을 키워내는 억척스러움은 애초에 엄마에게 없는 기질이었다. 언젠가 내가 "엄마는 왜 그렇게 못 했어?"라고 철없이 물었을 때, 엄마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하셨다. 그 웃음의 의미를 그때는 알지 못했다.


참다못해 하루는 엄마에게 따지듯 물었다.

“엄마, 왜 나는 오빠처럼 공부 안 시켰어?”


엄마는 원망이 가득 담긴 내 눈을 피하지 않고, 그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땐 어쩔 수 없었어. 그래도 너 나중에 대학 갔잖아. 너는 워낙 똑똑하니까, 엄마는 믿었지.”


어린 마음에 그 대답이 참 밉고 서운했다. 변명처럼 들렸다. 하지만 쉰을 훌쩍 넘어 엄마의 주름진 얼굴을 다시 바라보는 지금, 나는 깨닫는다. 그것은 가난 속에서 엄마가 내게 보내줄 수 있었던 가장 큰 믿음이자, 서툴지만 진심이 담긴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두 개의 세상이 만나다.


몇 년 동안 엄마가 우리 집에서 함께 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세상이 만나는 것을 보았다. 나의 남편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부모님과 여섯 형제가 늘 함께하는, 사랑이 넘치는 다복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그의 세상에서 ‘엄마’란, 당연히 따뜻한 밥을 짓고 자식들을 살뜰히 챙기는 존재였다. 그랬기에 처음에는 우리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의 눈에는 딸이 부엌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하는 동안, 장모님이 식탁에 턱을 괸 채 그저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기만 하는 풍경이 낯설고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남편에게 들키는 것이 창피하고 싫었지만, 세월이 흐르니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엄마는 그냥 그런 사람인 것을. 다행히 마음 따뜻한 남편은 결국 그런 엄마를 있는 그대로의 ‘우리 엄마’로 인정하고 사랑해 주었다. 집에 혼자 계시면 심심하실까 봐 집 근처 복지관에 직접 모시고 가 등록까지 해드릴 만큼, 다정한 사위가 되어주었다.


엄마는 남이 해준 음식을 가장 좋아했고, 아들 집에 가서는 며느리가 불편할까 봐 절대로 냉장고 문 한번 열어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며느리들조차 엄마를 ‘공주님’이라 부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 엄마였기에,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내 소풍 김밥을 내가 직접 싸야 했다.


사랑을 빚는 단단한 손


그렇게 단련된 덕분에, 이제 내 아이들은 나를 ‘원더우먼’이라 부른다. 엄마는 무엇이든지 다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는다. 하루 4시간 이상 서서 딸들의 반찬을 만들고 나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온몸이 쑤시지만, “엄마, 미쳤어! 너무 맛있어!”라는 아이들의 환호 한마디에 나는 스르르 녹아내린다. ‘그래, 나는 어쩔 수 없는 무수리 팔자인가 보다.’ 속으로 웃으며, 나는 다시 부엌에 선다.


칠순이 넘어서도 옷가게 주인이 ‘이효리가 입은 스타일’이라며 건네주는 옷을 아이처럼 좋아하던 소녀 같은 엄마. 그리고 그 엄마를 지키기 위해 일찍부터 두 손이 단단해져야 했던 딸. 우리는 참 많이 달랐다.


쉰이 넘어 엄마를 다시 생각한다. 엄마와 나는 그저 다른 천성을 가진,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서로를 사랑했던 것이었다.


엄마가 나에게 해준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엄마는 나에게 바라는 것도 없었다. 내가 해준 잡채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드시던 엄마, 내가 담가준 김치를 기다리며 ‘내 먹을 것은 있지?’라고 수줍게 묻던 엄마의 모습이 이제야 선명하게 떠오른다.


엄마의 여리고 고왔던 손도, 그 엄마를 지키기 위해 단단해져야 했던 나의 투박한 손도, 결국은 같은 모양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곁은 떠나셨지만 다른 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잘 믿지 않기에, 나는 이렇게 우리의 특별했던 사랑 이야기를 글로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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