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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길을 알려주는 어른이 없었다

어른의 세계, 그 막막함 앞에서

by 달빛서재

나는 오빠만 둘인 집의 늦둥이 막내딸이었다. 전쟁의 상흔을 안고 이북에 고향을 둔 채 평생을 치열하게 사셨던 아버지에게, 나는 지친 삶의 끝에서 얻은 세상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온 동네가 떠들썩한 잔치를 열었다는 나의 탄생은, 그 시절 아버지의 깊게 팬 주름 사이로 번지던 가장 큰 자랑이자 마지막 기쁨이었다.


세상 전부였던, 아버지라는 우산


아버지의 사랑은 나를 세상의 모든 비바람으로부터 지켜주는 절대적인 우산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누구도 내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도록 늘 내 앞을 막아서던 든든한 산과 같은 분이었다. 그 넓고 따뜻한 품 안에서 세상의 모든 빛은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만 있으면, 나는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견고했던 우산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너무도 갑작스럽게 내 손을 떠나버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세상은 하룻밤 사이에 모든 색을 잃고 차갑게 식어버렸다.


"형님 덕분에 우리가 산다"며 문지방이 닳도록 집을 드나들던 친척들의 발길은 눈에 띄게 뜸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끊겼다. 아빠라는 가장 큰 나무 그늘이 사라지자, 그 그늘 아래 잠시 머물던 사람들은 미련 없이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너무 일찍 어른의 무게를 짊어진 아이


마흔여섯의 나이로 홀로 3남매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낡은 가방을 메고 매일 새벽 일터로 향해야 했다. 온기 사라진 텅 빈 집안을 채우는 것은 아직 작기만 한 나의 몫이 되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서툰 솜씨로 빨래를 하며, 나는 아주 일찍부터 어른의 삶을 흉내 내야 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는 '도깨비시장'이라 불리는 왁자지껄한 시장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저녁거리를 사고, 퇴근한 엄마가 고된 몸으로 바로 저녁을 준비할 수 있도록 미리 채소를 다듬어 놓았다. 새벽같이 일어나 엄마와 두 오빠, 그리고 내 도시락까지 네 개를 나란히 싸던 그 아침의 무게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새겨진 기억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제사를 준비하던 일이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아버지의 제삿날이 다가오면 혼자 버스를 타고 상계동 집에서 청량리 시장까지 가야 했다.


그곳에서 장사를 하시던 고모가 제사 음식을 사주시면, 어린 나는 양손 가득 무거운 음식 꾸러미를 들고 다시 그 먼 길을 돌아와야만 했다. 낑낑대며 버스에 오를 때마다, 가방 안에서는 사라져 버린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 책임감의 무게가 함께 찰랑거렸다.


그때 우리가 살던 낡은 주택 마당에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펌프가 있었다. 차가운 쇠로 된 펌프 손잡이를 온몸으로 눌러가며 물을 길어 빨래를 하고 있으면, 동네 어른들은 혀를 차며 엄마는 뭐 하냐고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그 동정 섞인 시선과 날카로운 말들이 두려워, 나는 늘 남들의 눈을 피해 좁은 부엌 한구석에 웅크리고 숨어서 빨래를 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어둡고 축축한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말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지우는 법을 너무 일찍 배워버렸다.


나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탓에, 세상 모든 아이들이 나처럼 사는 줄로만 알았다. 그저 내게 길을 알려주는 어른 한 명 없이, 이 막막한 어른의 세계를 홀로 걷는 법을 온몸으로 배워야만 했다.


사랑을 다시 배우다.


아버지의 빈자리가 내 삶에 얼마나 커다란 구멍을 남겼는지는, 먼 훗날 남편이 우리 딸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아프게 깨닫게 되었다. 온전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남편은, 그 사랑을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흘려보내는 사람이었다. 그 다정한 눈 맞춤과 스스럼없는 표현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참 밝고 건강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로 자라주었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놓쳐버린 유년의 풍경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것이 바로 저런 모습이었음을 말이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항상 아이들에게 내가 보지 못했던 더 넓고 따뜻한 세상을 보여주고자 그토록 애를 썼다. 내가 가지지 못했던 길잡이가 되어, 내 아이들의 세상만큼은 온전하고 흔들림 없는 사랑으로 단단하게 채워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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