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는 말 뒤에 숨었던 시간들
내게는 버릇처럼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었다. 바로 ‘괜찮아’라는 말이었다. 몸이 조금 아파도 괜찮은 척, 마음이 무너져 내려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특히 엄마, 아내, 며느리라는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사는 동안에는, 내 감정을 솔직하게 꺼내 보이는 일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속상한 마음, 서러운 마음, 아픈 마음들을 그저 꿀꺽 삼키는 게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애써 삼킨 마음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여, 끝내 ‘화병’이라는 단단한 응어리가 되고 말았다. 지난 9년간 나를 괴롭혔던 암 투병의 시간보다, 어쩌면 이름 모를 이 마음의 병이 나를 더 아프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단단한 응어리를 풀어내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남기 위해’ 쓰기 시작한 나의 이야기다.
명치끝에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얹힌 것처럼 늘 가슴이 답답했고, 속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이 치솟았다. “초기 암이라더니,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네?”라며 내 아픔을 가벼운 이야깃거리로 삼는 사람들 앞에서는 쓰린 속을 감추고 웃어넘겨야 했다.
어떤 이들은 내 앞에다 대고 다른 누군가의 재발 소식을 전하며, 영혼 없는 목소리로 ‘조심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정작 그들은 몸에 좋은 아주 값싼 영양제 하나 챙겨주지 않으면서, 그저 시원하고 따뜻한 곳에서 편안하게 말을 뱉어낼 뿐이었다.
나를 조금만 배려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말들을, 그들은 너무나 쉽게 했다. ‘무리하지 말라’는 그들의 말은, 그래서 더 아프고 우스꽝스럽게 들렸다.
처음 암 진단을 받았던 날, 나는 아직 내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딸들 생각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재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또다시 이 끔찍한 과정을 겪어야 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불행 중 다행히 앞으로 계속 지켜보자는 진단을 받았지만,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의 차가운 한마디는 내 삶에 족쇄처럼 남았다. 지금도 내 몸 안의 염증 수치는 여전히 높다.
그렇게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소리 없이 우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더는 버티지 못하고 꾹꾹 눌러 담았던 모든 것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 찾아왔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쳐버린 나는, 내 삶의 이유이자 가장 사랑하는 두 딸아이 앞에서 결코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내뱉고 말았다.
“죽고 싶다.”
그 한마디에, 언제나 내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아이들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딸들은 저를 붙잡고 울면서 말했다. 차라리 자기들이 다 포기하겠다고. 원하는 것 아무것도 없어도 좋으니, 제발 엄마가 그런 생각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아이들의 눈물을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암 덩어리가 아니었구나. 괜찮다는 말 뒤에 숨어 표현하지 못하고 쌓아두기만 했던, 바로 내 마음의 병이었구나. 내가 만든 감정의 감옥에, 나 스스로 갇힌 것도 모자라 가장 사랑하는 아이들까지 함께 가두고 있었구나.
그날 밤, 나는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 더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어떻게든 이 지독한 응어리를 풀어내야만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거창한 꿈보다는, 아픈 나를 치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전부였다. 복잡하게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듯, 내 안에 켜켜이 쌓인 아팠던 감정들을 한 줄 한 줄 글로 풀어내고 싶었다.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오롯이 나 자신과 마주하며, 그동안 외면했던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었다.
그리고 혹시, 지금 이 순간에도 ‘괜찮은 척’하며 홀로 눈물 삼키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의 이 아픈 기록이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작은 위로가 되고, “이렇게 다시 일어설 수도 있구나” 하는 조용한 용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