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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가지를 위한 마음

by 도시골사람 Mar 06. 2025






  며칠 사이 몸을 움츠리지 않아도 좋을만한 바람이 불어온다. 빈 가지라 여겼던 곳들이 하나둘씩 오랜 시간 동안 소식 없던 무심한 친구의 얼굴처럼 겸연쩍게 물올랐다. 찬 공기를 해치고 나오는 급한 성격의 매화와 설유화는 동그스름한 작은 꽃눈들을 가지마다 촘촘히 매달아 두고, 깨어날 시기를 헤아리고 있다. 폭닥해진 흙 위로 뾰족이 솟아난 크로커스 잎을 보며 바람을 느낀다. 앞으로 수개월 동안은 아무것이 없다고 여긴 자리들 위로 다가올 봄을 겪지 않은 이라면 차마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순서대로 돋아 나는 풍경을 볼 수 있으리라.     

  어스름한 새벽, 잠에서 깬 아이가 품 속을 파고든다. 이불을 제대로 덮지 않은 모양인지 어깨가 차다. 걷어찬 이불을 덮어주고 돌아섰던 지난밤을 떠올리며 아이를 품 속에 꼭 껴안는다. 푹 잘 잤어? 네, 엄마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우리 애기 덕분에. 엄마 사랑해요. 엄마도 사랑해. 조금만 누워 있다 일어나면 안 돼요? 되지 그럼. 우리 10분만 이렇게 껴안고 있을까? 엄마 최고. 가진 품을 내어주는 일만으로도 세상 무엇보다 높은 곳에 위치할 수 있는 시기를 보내고 있음에 감은 두 눈이 뜨거워진다. 아무것도 없다고 여긴 나의 가지 위에 돋아난 아이들. 이 아이들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또 언젠가 고운 빛과 향을 내뿜는 열매로 자라나 내 곁을 떠나가는 날들을 차례로 떠올린다. 저마다의 씨앗을 품은 채 떠난 아이가 다시금 누군가의 가지로 자라나는 것을 보며, 나는 남겨진 잎이 붉게, 노랗게 물들어 떨어지는 시기를 감사한 마음으로 맞을 수 있겠지.     


  물오른 가지의 그림자가 차창 위로 드리우던 어느 이른 주말. 약속 장소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는 저마다의 손에도 따스함이 물올라 있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각각의 주전부리들이 마치 빈 가지 위로 피어오른 무엇처럼 느껴진다. 그 모습이 퍽 화사하다. '도란도란'이라는 단어가 공기 중을 떠다니는 시간을 보낸다. 다음의 도란함을 약속한 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혹여나 약속을 잊을까 달력 앞으로 향하는 걸음에 조급함이 묻는다. 한 장씩 넘겨가며 약속을 눌러쓴다. 3월에, 그리고 4월에. 4월의 약속을 위한 마감일을 적다 말고 펜을 쥔 손끝이 멈칫하고 만다. 노란 리본이 곱게 그려져 있다.     


  세상의 모든 빈자리가 수두룩이 채워지는 계절에 떠난 누군가의 싹과 열매, 그리고 고운 빛의 잎들을 생각한다. 자연스레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가지를 가슴에 묻을 이들이 따라 떠오른다. 푸른 새벽 나의 품을 파고들 차가운 어깨가 없는 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흐트러진다. 그 차가운 어깨에 돋아 날 새로운 싹과 열매를 기대할 수 없음을 가정하는 일만으로도 기도(氣道)의 뿌리가 뻐근해진다. 그들에게 전할 수 있는 위로는 내게 없다는 듯 짙은 허무가 마수를 뻗는다. 하지만 얕은 삶을 가진 나는 이 뜨거운 감정을 허무하게 여기지 않기로 또, 다시, 계속해서 매해 봄이 찾아올 때마다 다짐한다. 슬픔은 알아차리는 것만이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는 감정이므로. 인식만이 나눠가질 수 있는 그 감정에 다가서는 의지를 통해서, 내가 뱉어낸 오늘의 숨이 인간의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지. 이 작은 숨이 서로의 허무를 지우며 넘실거리는 슬픔을 껴안을 수 있기를. 현관 입구에 반쯤 쓰러져 있는 책가방, 학사모 아래로 반짝이는 눈동자, 꽃그늘 아래에서 느낄 행복을 당연시하는 오만으로 애도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기로 한다. 잃은 것을 떠올리는 마른 가지들이 외롭게 떨리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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