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도움 없이 갓 혼자 설 수 있다 여기게 되는 순간의 혈중 오만 농도를 잴 수 있다면 어떨까? '수영은 네 가지 영법을 다 할 줄 알게 될 때부터가 시작이다.'라는 유명한 수영 격언이 있다. 수영 인생 중 혈중 오만 농도 최고치에 달하는 순간을 꼽자면 단연코 접영, 배영, 평영, 자유형, 이 네 가지 영법이 모두 가능해질 무렵일 것이다. 앞서 말한 격언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유에는 대부분의 수영인들이 이 시기를 짧게라도 겪기 때문인 것 같다. 이때의 수영인은 일종의 중2 병과 맞먹는 상태가 되는데, 이들 대부분은 각자의 수영장에서 박태환, 매킨토시, 펠프스, 마르샹에 빙의한 채 날뛰게 된다. 이 대목에서 대부분의 수영장이 촬영 금지 장소라는 점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오로지 지산들의 기억 속에서만 숨 쉬는 오만 농도 최대치의 모습들에 짧게 진저리 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나에게도 이제 갓 네 영법을 익힌 시선으로 타인의 실력을 함부로 평가하던 낯 뜨거운 시절이 있었다. 아직 두 발이 좆밥의 탕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 나댔던 그때를 생각하면 벼랑 끝에 선 것처럼 모든 감각이 아찔해진다. 조용히 수영만 하다 나올 것을 감당할 수 없는 자아 비대로 속으로라도 누굴 가르치려 들었던 순간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체력이 미천한 나는 언제나 그곳의 지박령처럼 레인의 끝에 서 있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레인 끝에 서서 숨을 돌리고 있었다. 해파리 영법으로 십 수바퀴를 돌던 할머니 한 분께서 드디어 숨을 돌리시려는지 내 옆에 멈추셨다. 느린 속도로 앞을 가로막던 할머니가 쉬시는 동안 마음껏 속력을 낼 생각에 마음이 작게 방방 뛰었다. 할머니께서는 찡그린 눈으로 맞은편 시계를 지켜보시더니 수경을 쓰려는 나를 보시곤 "새댁아, 지금 몇 시고?" 하며 물으신다. 체력에 비해 쌩쌩한 눈을 가진 나는 할머니께 시간을 알려드렸다. 시간을 들은 할머니께서는 "아이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이제 나가야겠다. 새댁 고마워~" 하며 가볍게 점프해서 수중 스타트를 하셨다. 그리고 완벽한 파워 접영으로 반대편 레인 끝에 도달하신 뒤, 탈의실을 향해 홀연히 떠나셨다. 나는 그저 그녀가 사라진 통로를 멍하니 지켜봤다. 그 순간을 설명하는 지금도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모든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오만의 시기에 찾아 든 편견을 깨어 부수는 순간들. 그런 순간들이 여러 차례 쌓여 두 손을 조신하게 맞잡도록 한다. 때때로 '잘' 안다. '잘' 한다.를 판가름한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한다. '잘' 되는 일로 밥을 벌어먹는 수준에 이르렀다면 그것을 '잘 한다'라고 여길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수준에 대한 기준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석연치가 않다. 모든 상황에서 오는 필연적인 상대성이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잘 한다'라는 필요 이상의 자기 최면이 가져다주는 편협한 시선은 많은 것을 평가하게 만든다. 수두룩한 편협한 평가 속에서 나는 온전할 수 있을까.
주말 오후면 어김없이 마주치는 '우리 동네 펠프스'가 있다. 예상대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선 사람들에게 "자유형이 어쩌네, 접영이 어쩌네."한다. 언제 봤다고 날 보고는 롤링이 안 된단다. 네 영법 모두 그런대로 써먹을만한 우리 동네 펠프스가 언제쯤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될지 가늠해 본다. 한계를 모르는 미친 성정이 타고난 것이라면 어쩌지. 올 때마다 마주치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또 뭔가 지적하려 눈을 반짝이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짧은 번뇌를 끝낸 나는 '새댁 할머니'를 떠올린다. "아, 예~" 하곤 냅다 배영 스타트를 한다. 주 종목인 배영 바사로킥으로 기를 한풀 꺾으며 솟아오르던 콧대가 어쩐지 기분을 너절하게 만든다. 문득 '그 할머니의 주 종목이 접영이었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친다. 못마땅한 기색을 내뿜으며 쫓아오던 혈중 오만 농도 최고치의 풋내기를 가볍게 놀려주려던 고수의 죽비를 이제서야 맞고 정신이 번쩍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