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맵 평점 1점 피부과의 진실

촌스럽고 웃기고 편안한 우리 동네 피부과

by 군옥수수맛아몬드

우리 동네 피부과에는 아주 웃기고 사랑스러운 피부과 의사 K가 있다.

나이는.. 회사 사무직이었으면 진작 은퇴하고도 남았을 나이. 외모는.. 왠지 학창 시절에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을 것 같은 총기 가득한 눈빛과 그것을 감싸는 두꺼운 안경. 병원 인테리어는 그의 외모만큼이나 평범하고 예스럽고 촌스럽다. 촌스러운 간판과 글씨체, 체리몰딩, 장미가 프린팅된 쿠션감 있는 앤틱 의자,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는 인체조직도까지. 전국 어느 피부과에서나 다 틀어놓을 법한 고급스러운 선율의 피아노 BGM도 틀어놓지 않았다. 피부관리실도, 피부관리사도 없는 이 공간은 말 그대로 시대에 뒤떨어졌다.

약 2년 전, 엉덩이에 피지낭종(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2년 후 K가 표피낭종이라고 정정해주었다)이 생겨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서울에서 피지낭종 제거 수술로 제일 유명하고 후기 많다는 병원이었다. 이후에는 내 엉덩이를 내가 보지도 않고, 남에게 보여줄 일도 없어서 잊고 살았는데, 2년이 지난 어느 날 엄마가 내 궁둥짝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엉덩이에 까만 점 두 개가 양쪽에 대칭으로 아주 크게 나 있다며. 반 정도는 웃음을 참으면서. 뭐 나야 거울을 통하지 않는 이상 내 엉덩이를 볼 일은 없어 괜찮지만, 후에 내 엉덩이를 보고 놀랄 누군가를 위해 피부과를 찾았다. 거기서 K를 만났다.


촌스럽고 유행에 뒤처진 이에게서는 왠지 모르게 고수의 향기가 나는 법. 그의 방이라고 할 수 있는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그가 고수임을 직감했다. 책상 위에는 미용 목적의 시술 관련 자료집이 아닌 갖가지 피부 모형도와 돋보기가 올려져 있고, 벽면에는 어느 협회 회원이라거나 어디에서 상을 받았다는 내용의 화려한 스펙이 아닌 온갖 피부 질환을 지칭하는 단어들의 영-한 번역본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크게. 미용 목적으로 피부과만 n년을 다닌 나는 그의 책상과 벽면을 보자마자 느꼈다. 이 사람, 뭔가 다르다고.

피지낭종이 아니라 표피낭종일 것이라고 둘의 차이를 한참 설명하던 그의 앞에서 엉덩이를 까자마자 그는 이야기했다. 30년이 넘도록 의사 생활을 하면서 이런 모습의 켈로이드 반응은 처음 보는데요. 이건 켈로이드가 아니라 뭐랄까.. 뭐랄까… 하면서 의학용어로 추정되는 영어를 남발했다. 그러다가 별안간 그는 책상에서 돋보기를 집어 들더니 의자 바퀴를 스윽- 굴려 벽면에 붙은 포스터에 돋보기를 갖다 대었다. 포스터는 <’ 최신반영’ 의학용어 영-한 번역본>. 의학용어의 한국어 표기가 계속 바뀌어서,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한 자기로서는 아주 힘들단다. 그러면서 몇 가지 질환을 말해주었다.

치료 주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맞아야 하는데, 맞을 때마다 그는 대체 수술을 어디서 했냐고 물어본다. 나는 이제 K를 만날 때의 레파토리와 그가 내뱉을 대사들이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강남 어느 병원에서 수술했었냐고 묻겠지. 그러면 나는 이름은 기억이 안 나고 그냥 제일 유명한 병원이었다고, 간판에 외과라고 쓰여 있었다고 할 거야. 그러면 그는 역정을 내며 피부 질환은 피부과에 가야 한다고, 외과 걔네가 표피낭종을 만만하게 봐서 수술해 놓고 망쳐 놓은 거라고 나를 혼낼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미 골백번은 더 들은 이야기지만 적당히 놀라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그래도 지난번보다는 많이 나아졌다며 앞으로도 꾸준히 주사 맞으러 오라고 할 것이다. 단호하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지난주 역시 주사 맞으러 갔다가 솔깃한 메뉴판을 봤다. 인중 레이저 제모가 5만 원이라니. 바로 프런트데스크에 달려가 레이저를 받겠다고 이야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냥 레이저 제모 하나 받는 것인데도 K의 설명이 점점 길어진다. 그는 레이저 제모의 원리부터 시작해서 레이저 한 방이 닿는 면적, 그래서 레이저를 총 몇 방을 맞아야 하는지, 기계는 또 어떤 기계인지 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러다가는 이내 아플 수도 있다, 부어오를 수도 있다, 간지러울 수도 있는데 원래 그런 거니 걱정하지 말아라, 레이저 제모 후에 바르는 크림을 처방해 주겠다, 그래도 이상하면 바로 병원에 와야 한다고 단단히 타일렀다. 시술 부위만 체크하고 바로 레이저실로 데려가 일단 눈부터 덮는 레이저 제모를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그의 설명을 듣는 데에만 5분이 넘게 걸렸다.


최신 레이저 제모 기계는 레이저를 쏘는 동시에 시원한 바람을 내보내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시술 부위에 마취 크림을 바를 필요도, 닦아낼 필요도 없이 수십 초 안에 시술이 끝난다. 내가 마취 크림을 바른 것은 얼굴 모공에 구멍을 뚫어 깊숙이 박혀 있는 피지를 짜내느라 초강력 레이저를 사용할 때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프런트데스크에서 나를 부르더니 로비에서 내 인중에 마취크림을 발라주었다. 칸막이가 있는 공간도 아닌 로비에서. 그러더니 주방용 랩을 부욱 찢어 인중에 붙여주었다. 손님이 없었기에 나는 하얀 콧수염을 덕지덕지 달고도 수치스럽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그의 손에 맡겨졌다. 마취가 완료될 때까지 20분을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20분이 지나고, 나는 얌전히 레이저 시술실에 누웠다. 레이저 시술용 안대가 아닌 얇은 천이 내 눈에 얹어졌다. 불이 번쩍번쩍할 때마다 눈이 핑- 돌았다. 지금부터는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에 의존해야만 했다. 별안간 K가 성질이 난 것 같았다. 그는 레이저 기계로 추정되는 사물을 여러 번 껐다 켰다. 뭐가 잘 안 되나 보다. 이 아날로그한 상황이 너무 웃겨 있는 힘껏 입술을 물었다. 그 후에도 한참이나 있다가 나는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K의 당부가 시작됐다. 약 잘 발라야 한다, 빨개질 수 있다, 너무 아프면 병원 와라… 그러니까 최신 장비가 있고 인간미가 조금 없는 다른 병원에서는 수십 초 걸리는 일이, K의 병원에서는 레이저 시술을 받는 시간까지 합쳐 40분 걸렸다. 극한의 효율을 중시하는 내가 그냥 웃었다. 웃기면 그게 효율적인 거지.


사실 이 병원은 카카0맵에서 평점이 2점대이다. 후기에는 대부분 이렇다. 고리타분함, 환자를 혼냄, 환자를 가르치려고 함. 나는 카맵 후기를 맹신하는 편이다. 카맵 평점 좋은 곳에 가서 실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이 동네에 피부과가 여기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통탄스러워하며 갔다.

이번에도 카맵이 맞았다. K는 확실히 고리타분하고, 나를 혼내며, 나를 가르치려고 한다. 그러나 불편함 투성이 프로불편러인 나는 왠지 모르게 K의 피부과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것이 촌스러운 인테리어 때문인지, 갈 때마다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프런트데스크의 이주여성 덕분인지, 뭐든지 다 알고 질병의 원인을 분명하게 밝혀주는 K의 학자적 면모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가 내가 자장가로 삼아 단잠을 자던 학창 시절 선생님의 목소리와 닮아서인지, 혹은 그의 앞에서 나는 온전하게 돌봄과 치료만을 받는 대상으로 남아 있어도 되어서인지 나는 모른다. 그리고 심지어 아주 웃기다. 의학용어 최신 영한번역본에 별안간 돋보기를 주욱- 들이대는 것도, 남들은 다 그냥 해주는 레이저 제모 하나에도 심각한 얼굴을 하는 것도, 로비에서 마취크림을 덕지덕지 발라주는 것도, 무언가 서툰데 마음은 담겨 있는 손짓들도. 한바탕 웃거나 보살핌을 받고 싶어지는 날이면 K의 피부과에 간다. 새로 이사 온 동네에 정을 붙여가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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