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02. 12.
몇 해 전, 노량진 학원에서 본 응원문구. 이 때의 나는 몇 차례의 실패 때문에 좌절감이 쌓여 '올해는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 이렇게 공부한다고 올해는 될까'라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래도 합격하고 싶었는지 시험은 놓지 못하던 상태. 그 때 위의 문구를 발견했다. 방법을 찾아 결국 합격해서, 내가 합격했으니 당신들도 합격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는 별, 희망, 조력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더 나아가 학생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안내할 수 있는 교사가 되어야겠다고도.
그 과정에서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끝없는 자기 혐오, 절망감, 막연함, 무력감. 번의 상호교류분석에 따를 때 부모 자아는 나 스스로를 끊임없이 비난했으며, 어린이 자아는 두려움에 빠져 있었고, 그 와중에 어른 자아만 정신을 차리고 '그래도 공부해야지 어떻게 해'라며 나를 이끌어갔다.
커트라인에서 번번이 1~3점 차이의 점수로 떨어지는 와중, 시험에 환멸감이 들어 무작정 일을 구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무경력이었기에 서류 단계에서 떨어지는 것도 부지기수, 운 좋게 나를 좋게 봐주셨던 교감선생님께서 함께 일을 해보자고, 학교로 이끌어주셨다. 20대의 후반이 시작되던 나이. 나는 내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으나 학교에서는 새파랗게 어린 막내였고, 선생님들은 불면 날아갈까 나를 따뜻하고 살뜰하게 챙겨주셨다.
실제 학교 현장은 독서실에서 그렸던 것보다 더욱 역동적이었고, 즐거웠다. 매번 새로운 수업, 상호작용을 구상하는 것 또한 즐거움이었다. 원격수업을 해야할 때, 원격 수업 영상을 만드는 게 어찌나 재미있던지. '선생님 수업 영상이 제일 재밌고 좋아요'라고 학생들이 말 해줄 때 얼마나 뿌듯하고 감사하던지. 무엇보다 학창시절부터 가장 좋아했던 국어 과목을 내가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마냥 행복했다. 학생들과 눈을 마주치며 상호작용하고, 그들의 성장과 성취를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이 매일 벅찼다.
내가 학교에서 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게 되었지만 시험의 벽은 꽤 높았다. 재작년, 1점 내외의 점수로 또 떨어졌을 때, 나는 임용 시험을 포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11월 말에 치러지는 시험의 특성상, 시험 결과 발표가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해가 넘어가게 된다. '이룬 것 없이 시간만 흘려보내게 된다.'라는 생각이 20대의 끝을 달려가는 나를 압박해왔다. 1년을 갈아 넣어도 붙을까말까 한 시험이어서. 최근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친구를 붙잡고 방법을 물었고, 그렇게 공무원 시험에 도전해보았다.
1월부터 6월까지, 150여일의 시간. 단순 암기 과목이 많던 시험의 특성상 공부가 어렵거나 힘들진 않았다. 다만,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을 보며 '나도 저런 선생님이 되고 싶다'라고 마음 먹었던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나에게 죄를 짓는 것만 같아서. 수 차례의 좌절에도 다시 독서실에 가 펜을 잡던 그간의 나에게 미안해서. 하루가 끝나고 잠시 여유가 생길 때마다 멍해졌다. 스치는 바람에도 그저 괴로웠다. 그 때 썼던 일기를 최근에 다시 들춰봤는데, 행간에서, 글자 한 획 한 획에서 고통에 절은 비명이 들리는듯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고, 나는 누구냐고 물어보는 문구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감상은 시험 점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념을 잊고자 하루 15시간씩 공부해가며 단기 합격을 노렸다. 덕분에 100문제 중 총 12개의 문제를 틀렸다. 그러나 내가 응시했던 지역의 커트는 훨씬 더 높았다. 여기서도 합격이 안 되네. 세상이 원망스럽고, 나는 공부를 하면 안 될 머리를 가졌나 싶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성취하지 못해내는 내가 한심했고, 모든 것을 놓고 편해지고 싶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나. 뭘 할 수는 있나.
시험이 끝나자마자 한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와서 기간제로 일해달라고. 차라리 다행이었다.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돈이라도 벌자는 생각에 냉큼 달려갔다. 학생 수가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학교였다. 내가 1, 2, 3학년 모두의 국어 과목을 책임 진다는 것이 두려웠지만 덤벼들었다. 우려와는 다르게 결과는 성공적. 그 전에 시험 문제를 내고, 수행평가를 출제 및 채점해보고, 학생들을 대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업무 시간이 끝나고, 관사에 혼자 있을 때 꽤나 눈물을 훔쳤다. 그동안 내가 했던 것이 의미없는 게 아니라 모두 나에게 쌓여있었구나 싶어서.
상냥하고 활기 넘치는 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고, 9월부터 '또' 도전했다. 그래, 20대의 마지막 시험인데, 어떻게든 되겠지. 안 되면 뭐 어떻게 해. 다행히 시험은 풀 만 했고, 1차 시험 결과 발표가 있었던 작년의 마지막, 12월 31일. 나는 내 20대를 1차 합격으로 마무리했다.
화면을 보는데 믿기지 않았다. 항상 명단에 없다는 문구만 봐왔는데. '합격, 축하'라는 단어가 왜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스타그램에서 합격자들은 항상 장문으로 무어라 구구절절 말하던데 그 때의 내 머릿속에는 '헐.' 한 글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국어과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곧장 스터디를 구하고 2차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2차 시험은 첫 날은 수업실연, 두번째 날은 심층 면접을 시행한다. 다행히 그 동안의 학교 현장 근무 경험 덕에 시작이 어렵지는 않았다. 머릿속에는 그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최종 불합격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 번에 붙어서 끝내야한다 뿐이었다. 1차 시험이 끝나고 3주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쏜살같이 지나갔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면접 준비를 위해 유튜브에 있는 온갖 교육 다큐멘터리를 보고, 주변의 선생님들께 내 영상을 보내 피드백을 요청하고, 지도서를 달달 외우고, 성취기준/조건별로 수업 실연 틀을 만들어 외우고.
그러다 2차 시험날이 지났다. 후련하긴 했으나 시험이 끝난 직후부터 불안감에 휩싸였다. 커트라인에서 2점이 높은 점수였는데, 어쩌면 1배수 밖에 있는 점수일텐데 결국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면접에서 조금은 아쉬웠는데 그게 내 발목을 잡으면 어떻게하나. 새로운 지옥이 펼쳐졌다. 늦은 밤까지 잠이 오지 않고, 이른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눈이 떠졌다.
초조함에 몸서리치던 2주가 지나고, 최종 결과 확인. 내 이름 아래에는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합격, 축하'라는 글자가 다시 한번 나타났다. 1차 시험 결과에는 '헐.' 밖에, 2차 시험 결과에도 '헐.'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왜 발표만 보면 어휘력이 확 떨어지는지.
최종 합격을 하면 몇 시간이고 오열하며 기쁨에 몸서리칠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머릿속에 물음표 백 개를 띄워놓고 주변 사람들에게 합격 소식을 알렸다. 그러다 처음 나를 거둬주셨던 교감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당신 딸이 합격한 것처럼 크게 기뻐해주셨다. 너무 고생했다고, 잘 할 줄 알았다고, 진심으로 기뻐해주시는 교감선생님의 말을 듣다보니 그제서야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부족했던 저를 믿고 거둬주셔서 감사했다고, 덕분에 저는 자신감을 가지고 계속 학생들을 대하고, 그것이 기반이 되어 이 시험의 끝까지 올 수 있게 되었다고 전했다.
끝. 드디어 끝이다. 20대의 나의 노력과 절망들로, 운 좋게도 30대를 합격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다행이다. 다행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다. 운이 좋았으며, 다행이며, 결국 해냈다. 시간이 꽤 걸렸지만 결국 해냈다.
아직 내 주변에는 합격에 다가가고 있는 이들이 남아있다. 그들에게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도와줄 수 있는 것도 무엇이든 도와주고자 했다. 나도 했으니 당신도 당연히 해낼 수 있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해줄것이다. 더 나아가, 이런 저런 좌절과 절망에 부딪혀 괴로워하는 학생들에게도 방법을 찾아 끈기있게 실행하면 잘 될 것이라고 안내하고자 한다. 누가 뭐래도, 사실은 나 자신이 무어라 좌절해도 결국 합격했으니, 이제 누군가의 별이 되고자 한다. 방법이 필요하다면 방법을 일러주고, 응원이 필요하다면 아낌없이 격려를 해줄 것이다. 나 조차도 나를 믿지 못할 때 그들을 믿어주며 옆에서 함께 걸어주는 조력자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