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껌정호랭이 Black Tiger Aug 17. 2023

14. 자식 이혼소식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일생

  

진실 씨 아버님은 2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으나 조실부모로 고아나 다름없이 살아오셨다. 어렵사리 결혼은 30이 넘어서야 했고 물려받은 자산이라고는 건강한 육체와 여기저기서 달라붙어 기생하려는 형제들 뿐이었다.  왜소한 체격의 아버님은 성격은 너무나 강직했다. 본인 소신과 자존심 하나로 뚤뚤 뭉쳐 살기 위해 아니 살아남기 위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늦은 결혼이지만 첫째 자식으로 남자아이인 진실 씨가 건강하게 태어나 줬으나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처갓집 동네에 자그마한 초가집을 마련해서 가족들은 머무르게 하고 돈을 벌어 와야 했기에 아버님은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삼양동이라는 서울에서도 외진 동네에 자리를 잡고 아버님 보다 한두 살 위인 저 먼 친척 조카와 제재소(製材所)를 개업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큰 문제없이 열심히 일을 해서 제재소는 잘 운영되고 있었다. 하루하루 성장하는 제재소를 함께 운영하던 조카는 아버님 몰래 조금씩 딴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실은 제재소를 운영하게 된 것도 진실 씨 아버님이 고향에서 처 이모부로부터 소 한 마리 값을 빌려 가지고 와서 차린 가계였건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얄팍한 조카는 순진한 아버님을 천천히 속여 가기 시작했다.


당시 삼양동 근처는 서울에서도 저 한참 외각 변두리인 탓에 제재소 차린 돈으로 땅 몇백 평은 충분히 살 수 있는 돈이었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 땅에 말뚝을 박고 줄만 처 두면 다음날부터 자기 땅이라고 우겨도 될 정도로 싸고 값어치 없는 땅이라서 아버님은 빌려 온 돈으로 땅을 사지 않고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제재소를 차린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출근해 보니 어제까지 일했던 내 제재소인데 엉뚱하게 모르는 사람들이 점령하고 오늘날자로 자기들이 인수했다면서 기계들을 돌리고 있었다. 함께 일하던 직원들까지 모두 새로 인수했다는 사람들과 한통속이었고 그 먼 조카는 어디론가 사 라저 버리고 나타나질 않았다.


그 나뿐 조카가 나이 어린 삼촌을 배신하고 문서를 조작해서 이미 다 팔아 버리고 어디론가 도망처 버린 것이었다. 백방으로 수소문에 수소문을 해도 어디로 도망갔는지 그 먼 나뿐 조카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 길로 아버님은 본인 제재소에서 쫓겨나는 무일푼 신세가 되고 말았다.


몇 년이 지난 후 상도동에서 건축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불야불야 이를 악물고 찾아갔더니 한창 유행하던 빌라를 여러 채 지어서 분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주택들만 다 분양되면 삼촌 돈 다 드리겠다."는 사기꾼의 말을 믿고 기다렸으나, 아버님에 대한 채무는 갚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면서 본인만 비싼 고급 세단 자가용에 기사까지 두고 살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긴다는 소식을 접하고, 다시 수소문해 찾아간 곳이 이번에는 동두천이었다. 여기에서는 상도동과 똑 같이 빌라를 지어 분양을 하면서 또 다른 사업으로 고급대추나무 가구 공장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아버님께서는 자식들 몇 명이 서울에 올라와 남의 집에서 살고 있으니, 전에 사기 친 채무 대신 분양하는 빌라라도 넘겨줘서 살게 해 달라고 애원조로 얘기를 했으나, 사기성이 농후한 조카는 알았다는 대답만 할 뿐 차일피일 미루며 행동으로는 옮기지를 않았다.


그렇게 알았다고 차일피일 미루던 나뿐 조카는 지은 죄가 많아서인지, 그 호화스럽게 살던 생활을 어떻게 잊고 갔는지는 몰라도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포기를 해야만 했다.


"인명은 재천이라던가?" 절대 남에게 눈물 나게 하면서 살아선 안된다. "남을 아프게 한 사람은 반듯이 자기 눈에선 피 눈물이 나거나 단명한다"는 옛 선현들의 말씀이 틀린 말씀 같지는 않다. 아버님은 오랜 기간 동안 진실 씨네 형제들이 고생할 때마다 그 받지 못한 돈 얘기를 하시면서 "본인이 당시에 잘했으면 너희들이 고생을 안 하고 살았을 텐데" 하시면서 아쉬워하시곤 했다.


빈털터리가 된 아버님은 어떻게든 서울에서 생활비를 벌어서 고향에 보내 주어야 했는데 생활비는커녕 빌려 온 소 한 마리 값마저 사기당하고 말았으니... 어디에 말도 하소연도 못 하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제재소에서 쫓겨난 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동가숙 서가식으로 방황하고 다니던 그때 누군가가 요즘 유행하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사서 시골에 내려가서 팔아 보라면서 라디오 총판을 소개해 주었다. 돈은 없지만 아버님은 죽기 아니면 살기였기에 무조건 잘 팔 자신 있다고 우기면서 한 번만 외상으로 밀어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믿음이 갔던지 총판 사장님이 꼭 팔아서 갚으라는 한마디만 하고선 통 크게 20대를 적은 금액이 아니었음에도 외상으로 밀어주었다.


이 라디오 20대를 왜소한 몸으로 완행열차에 싣고 고향으로 내려오는 동안 죽어라 고생은 했지만, 이번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다시는 일어설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아버님은 불철주야로 새로 나온 기계이다 보니 어디에서 도움을 받을 곳도 없을뿐더러 남들에게 기회를 넘겨주기 싫어서 혼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대해서는 門外漢에 생전 처음으로 대하는 기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죽기살기로 비싼 라디오를 분해와 조립을 수 없이 반복한 후에 조작법과 고장 시 수리법 등을 능숙하게 터득한 후 자신감을 가지고 여기저기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소개를 하고 설명을 잘 한 덕분으로 순식간에 20대를 다 팔았다.


여기에 재미를 부친 아버님은 몇 번을 더 서울을 오가며 라디오 장사를 제법 잘해서 더 이상 힘든 라디오 장사를 하지 않아도 전에 처 이모부로부터 빌려 갔던 소 한 마리 값은 물론 어느 정도 전답을 마련할 정도의 여유 자금까지 모을 수가 있었다.


고향에서 가족들과 이제부터는 행복하게 함께 살아갈 생각을 하고 적당한 전답을 구입하고자 찾고 있는 아버님께 마을 어르신이 자그마한 산이 한 필지 나와 있는데 그 땅을 개간해서 밭으로 만들면 괜찮을 테니 젊은 사람이 사서 밭으로 바꿔서 농사를 지으라고 귀띔해 주셨다. 아버님은 눈이 번쩍 띄었다. 지체할 여유도 없이 곧바로 모아둔 자금으로 처음으로 본인 이름으로 그 땅을 매입했다. 땅문서를 받아 든 아버님은 온 세상이 다 자기 것처럼 즐거웠다.


산의 형태는 좌우로 굽어 있고 몇 단계의 층으로 나뉘어 있는 정말 볼 품 없고 쓸모없는 황무지 땅이었다. 그러나 진실 씨 아버님은 어머님과 단 둘이서 매일매일을 이 산에서 매달려서 나무도 베어 내고 갈대 풀뿌리도 파내는 등 힘에 부치도록 일을 해서 가꾸어 나가자, 영 볼품없고 쓸모없던 황무지 땅이 제법 고급스러운 옥토 밭으로 변하면서 개간작업의 결과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추천해 주신 마을 어르신의 말씀은 틀리지 않았다. 힘은 들었지만 정리를 마친 산은 금싸라기 밭으로 점진적으로 변해서 가고 있었고 작고 볼품없었던 황무지 산은 언제였는지 모를 정도로 사라지고 없었다.


2년에 걸쳐 개간한 산은 금싸라기 보다 소중한 밭으로 변해서 한편에는 고추농사와 당시 제일 핫하던 특용 작물인 담배 농사를 짓고 반대편에는 양잠농사로 누에를 키우기 위해 뽕나무를 심었고 길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간 밭에는 땅콩을 심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곳에서 살다시피 일을 했다. "땅은 언제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정말 하루하루가 다르게 작물들은 성장을 했고 열매를 맺어서 가을이 되면 돈으로 돌아왔다.


몇 년을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자 아버님 수중에는 더 많은 여유 자금이 생기기 시작했고 조금의 욕심도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본체 집 구성이 방 두 칸에 작은 부엌 한 칸이 다였으나, 자금의 여유가 생겨 본체 아래빈터에 본체 보다 더 크게 아랫채 집을 짓고 거기에는 돼지를 키울 수 있는 돼지우리를 세 칸이나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아랫채에는 아버님이 손수 고생해서 개간한 밭으로 바로 연결될 수 있는 길이 있는 쪽으로 쪽문도 내서 일터와 집의 동선거리도 단축을 함으로써 밭에서 나오는 농산물들을 훨씬 편안하게 짐을 들고 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진실 씨네 집에는 동물 식구들이 많이 늘어났다. 벌써 어미돼지가 3마리에 새끼 돼지들도 여기저기 여러 마리 기르게 되었고, 어미 돼지 3마리는 모두 임신을 한 상태여서 머지않아 동물식구들이 더 늘어나게 되어 있었고, 반대 편 외양간에는 남의 집에서 씨앗소로 받아와 기르고 있는 소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진실 씨네가 금방 동네에서 최고 부자가 될 것 같았다.


이렇게 노력하고 고생해서 벌어 들인 돈으로 매년 겨울이 되면 아버님은 어떤 이유에서 든 마을에서 팔려고 나오는 논이며 밭을 매년 수백 평씩 사들였다. 땀 흘리며 일할 때는 너무나 힘들었지만, 고생한 보람은 바로 자산 증식으로 나타나니 이 보다 더 좋을 일은 없었다.


매년 봄이 되면 다시 한번 각오했다. "올해도 힘들겠지만 노력하고 더 매진해서 올 겨울에도 또 땅을 사 야지!!!."  참 열심히 살았다.


재산이 늘어나고 마을에서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이제는 50여 호 되는 마을 대표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활동도 많이 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정부에서 밀어붙이던 새마을운동 4H활동 퇴비 증산운동이 등등 정부 시책에도 잘 호응하면서 다른 마을에서 받지 못하던 여러 정부자금을 지원받아 와 마을을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했다.


당시 마을 대표로 있으면서는 다른 마을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다모작(多毛作) 농토를 만들기 위한 자금을 지원받아 1년에 한 번 밭으로만 사용하던 수천 평의 토지를 2 모작 3 모작을 할 수 있도록 수 km나 떨어진 큰 하천 물을 인공으로 끌어올려서 다모작 농토로 변신시켜 줌으로써 마을에서 큰 호응을 받기도 했고, 한때는 도시에서도 시도되지 않았던 다세대 주택과 공동 작업공간을 만들어서 활용함으로써 농촌에서도 도시 생활처럼 생활공간과 작업공간을 분리해서 생활하게 함으로써 농부들도 편안한 휴식을 취하면서 생활하고 상부상조해서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강력하게 추진도 했었으나, 당시만 해도 고지식한 어르신들의 반대에 부디 처서 성사는 되지 못했지만, 만약 성사만 되었다면 크게 자랑거리가 되었을 누구보다도 앞서 가는 생각을 하시기도 했다.


농촌 하면 떠오르던 벼농사 보리농사의 단순함보다는 담배 땅콩 자소 수박 등등 남들이 하지 않던 특용 작물을 선도적으로 시도해서 피해 본 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많은 소득을 창출하는 선진 농법을 자꾸 시도하셨다. 특히 수박농사에는 전국에서 내놓으라는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해서 농사를 지으시다 보니 당시 큰 슈퍼 체인에서 독점으로 계약해서 매년 매입해 감으로서 뿌듯한 자부심을 갖기도 했다.


그렇게 건강하게 부지런하게 열심히 사시던 아버님께서 언젠가부터 아니 막냇동생의 이혼 이후 갑자기 야위어 가면서 오른쪽 목에 약간의 도출이 되신다고 하셨다. 모든 식구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근처 병원 진료를 받았지만 특별히 아프지 않고 그래서 차일피일 날자를 보내면서 하우스 수박 농사를 열심히 짓고 계셨다.


그런데 웬걸 목의 도출은 하우스에서 커가는 수박과 함께 자꾸 자라 나 커지고 있었다. 하우스 수박 농사는 잘 되어서 시장에 넘기기만 하면 되는데 여기저기에서 수박에 탐을 내고 자기들한테 넘겨 달라는 아우성이 많았었다. 그러나 아버님은 남에게 주는 것보다는 그래도 친인척한테 주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고, 마침 제재소에서 사기를 친 형제 중에 수박 도매상이 있어서 그 조카한테 넘겨주고 바로 입금해 주기로 약속을 하고 서울로 올라와 정밀 검진을 받았다.


아뿔싸 세상은 왜 꼭 아픈 사람한테만 그런 고통을 다시 주는지? 그토록 평생 고생고생만 하시다가 이제 겨우 어깨 좀  펴고 재밌게 사시면 되는 상황인데 청천벽력(靂) 같은 소식은 목에 나타난 돌출은 암덩어리가 커 저서 나타난 것으로 종류는 "하인두암"이란다. 이 병은 생명줄인 목과 너무 가까워서 섣불리 수술도 불가능하고 거기에 연세가 있으셔서 치료법도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진실 씨는 오진이기를 바라면서 여러 대학병원들을 돌아다니면서 다시 검사를 받아 보았으나 혹시 나는 역시 나로 돌아왔다. 어느 병원에서나 아버님의 병명은 똑같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돌기는 안과밖으로 동시에 커지면서 기도와 식도를 지속적으로 압박해 하루 라도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 했다.


연세와 위험 부위인 탓에 수술은 불가하여 대신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로 대체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술이 아닌 치료의 한계는 분명했다. 처방에 의한 치료를 모두 마무리했음에도 그 돌기가 작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커져 갔고 갈수록 식도를 압박해 누름으로써 식사를 전혀 하시질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는 밥에서 죽으로 죽에서 미음으로 다시 국물로 점점 더 드시질 못하게 되어만 갔다.     


이 세상에서 건강에 좋은 것이 무엇이던가? 어디라도 달려가서 얼마를 주더라도 나을 실 수만 있다면 다 해드리고 싶지만, 아무리 좋은 걸 해 드려도 드실 수가 없다. 나중에는 아무것도 마실 수도 없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야위어만 갔다. 진실 씨는 너무나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세상에 수많은 병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입은 먹고 싶은데 먹을 수 없어서, 먹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병이...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야위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들의 아픔이, 제일 안쓰러운 병인 것 같았다.


치료도 모두 끝이 났고 더 이상 의학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오로지 신께 빌거나 기적의 요행을 바랄 뿐, 당시 2002년 월드컵이 한창 일 때인지라 히딩크 감독과 동일한 넥타이를 하고 있으면 그 행운이 온다 하여 그 넥타이를 구해서 드리기도 해 보았고,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매이매일 기도 하면서 나날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수박농사인 아버님 유작으로 키워서 남도 아닌 조카한테 넘기고 온 수박 대금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는데도 입금이 되지 않고 있어서 그 조카를 만나서 수박 대금도 받을 겸 고향집도 오랫동안 비웠기에 마지막 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슬픈 사연을 안고, 자존심이 강하신 분이기에 예쁘고 고운 하얀 개량 한복으로 갈아입혀서 건강한 사람처럼 고향분들한테 보일 수 있도록 치장을 하고서, 차가 밀리기 전에 이른 새벽에 아버님을 모시고 고향으로 향했다.


마지막 수박농사 대금을 받아야 할 조카네 집안과 진실 씨네 집안은 무슨 원수를 졌던 것인지는 몰라도, 젊은 시절 첫 사업에서는 다른 조카가 배신을 하더니 마지막 유작 수박농사 대금은 막내 조카가 떼어먹고 어디론가 없어 저서 행방불명이란다. 다행이랄까 조카 부인은 있어서 부부간에는 연락이 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단단하게 타일러서 바로 입금하라고 얘기하고 고향집에 도착하니, 그래도 내 고향이 최고였다. 몇 시에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건만 많은 분들이 식사도 준비해 놓고 진실 씨네 집에 모여 기다리고 계셨다.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다 나뿐 것만은 아니구나!!!" "그래도 우리 부모님 만큼은 인심 잃지 않고 잘 사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참으로 감사했다.


아버님의 마지막 수박농사 대금은 끝내 받지를 못했다. 평생을 살아오신 집과 평생을 일구신 전답을 일일이 모두 돌아보신 후 다시 서울로 모시고 올라왔다. 평생을 살아오신 고향을 등지고 몸이 아파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의 공기는 왜 그리도 슬프고 엄숙한 침묵이던지... 다시는 보지 못할 내 평생의 터전 그리고 그동안의 흘린 피와 땀이 서려 있는 그곳...  아버님의 머릿속과 마음은 어떠셨을까? 차마 누구도 물어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냥 슬픈 침묵으로 3시간 정도를 달려왔다.


실은 아버님은 누구보다도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에 늦게 결혼해서 얻은 6남매를 위해 평생을 몸 아끼지 않고 살아오셨기에 자존감 마저 강하신대 거기에 기름을 붓듯 전혀 상상도 하고 계시지 않던 막냇동생의 이혼 통보로 인해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은 그 스트레스가 아버님의 약한 몸 한구석을 파고들어 자리를 잡고 이 몹쓸 놈이 악성 암으로 변했을 거라는 주치의 설명을 들었지만, 아버님께서 던지신 한마디 "어떤 일이 있어도 형제들과 우애 있게 잘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동생들 누구에게도 이런 사실을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형제들의 우애를 위해 혼자만이 깊게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님은 더 이상은 사랑하는 자식들 자손들과 함께 하시지 못하고 73세 더 사시면서 자식들과 행복을 느끼시다 가셔서 될 텐데 그걸 못 기다리시고 조금은 아쉬운 젊은 연세에 이 세상과 평안하게 이별을 하시고 말았다.


2003년 12월 10일 진실 씨 나이 41세에  자식들이 평생을 고생하셨으니, 누구보다도 좋은 곳으로 가시라고 임종 직전에 갈아입혀 드린 깨끗한 한복으로 갈아입으시고, 저 멀고 먼 하늘나라로 장남인 진실 씨 집에서 온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복한 모습으로 영면(永眠)을 하셨다.


진실 씨는 지금도 아버님의 죽음은 너무나 아쉽다. "막냇동생의 그런 일만 없었어도, 아니 조금만 본인의 자존감을 내려놓으셨어도... 고생한 보람을 자손들과 누리면서 더 사시다 좀 더 늦게 가실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에 장례식 마지막 날 영구차를 붙들고 너무나 아프게 울면서 보내 드렸다.


누구나 그렇겠지요. 부모님이 그립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다?


안부전화 한 통이라도 살아 계실 때 하세요?

지나고 나면 많은 후회가 됩니다.


이전 13화 13. 칠순여행 선물로 사 오신 바이킹모자 또 받고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