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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계획서를 만들다

쓸친들 모여라!

by 옥대장

지역 공공 도서관에서 기간제로 근무한 것만 4년이 넘는다. 만학도로 전문대학교를 졸업하고 도서관에서 근무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졸업도 전에 실습을 나갔다. 실습이 끝나기 전 입사가 확정되어 반가웠고 고마웠다. 재계약과 계약 연장, 그것도 아니면 신규입사를 반복하며 근로를 이어가다 결정적으로 아이를 임신하게 되면서 그만두게 되었다. 임신 7개월, 부푼 배를 감싸며 민원인과 입씨름을 하던 지난한 시간이 지나 아이를 출산했다. 출산 후 육아를 하는 5년 동안 전직이 유용했던 건 아이에게 들이밀 책이 조금 더 다양하다는 것과 도서관을 드나드는 일이 해가 나고 지듯 자연스러웠다는 것뿐, 이렇다 할 경력은 의미가 없었다.


아이에게 보여 줄 책을 빌리고, 그때마다 내가 볼 육아서도 함께 대출해 집으로 돌아왔다. 거의 매일 같이 도서관을 드나들었고, 이용 횟수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시작할 때는 몰랐는데 내가 하는 육아의 형태가 책육아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멋모르고 시작한 책육아 덕분에 새로운 세계로 건너갈 수 있었다.


지역 공동체나 인터넷 카페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육아정보는 한계가 있었다. 전문적인 조언이 절실해 기웃거린 육아서의 대출 빈도가 높아지자 도서관에서 연락이 왔다. 올해 육아와 관련해 독서회를 만들 계획인데 진행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하니 나에게 그 자리를 맡아줄 수 있겠냐는 제안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 원대하고 광활한 세계를 알기 전이었고, 단순하게 사회적 자리를 하나 얻게 되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기간제 사서에서, 육아 맘, 이어서 독서모임 리더가 된 후 삶의 2막이 열렸다.


육아를 테마로 한 독서모임에서는 그간 내가 배우고 읽어온 책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독서지도학을 공부할 때 실습하며 읽고 연구한 그림책이며, 신생아 때부터 아이 머리맡에 앉아 읽어주었던 동화책, 발달 시기별로 양육자가 알아야 할 정보나 태도에서부터 아동학에 관련해 읽은 전문서적들이 육아를 이야기할 때 꽤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출산 전 나의 삶이 그다지 쓸모없는 이력이라 생각했는데 웬걸. 아동학을 전공하며 배우고 익힌 용어들에서부터, 그림책 독서지도 실습, 보육 교사 자격증 수료를 위해 실제 유치원에서 했던 실습기간을 포함해 문헌정보학을 전공한 이력으로 말미암아 책과의 거리를 가까이하며 늘 읽고 썼던 지난 시간들이 하나의 궤로 묶여 든든한 자산이 되었다.


단순하게 독서모임 리더로서 맹위를 날리기를 잠시, 기다렸다는 듯 책육아와 관련한 강의 제안이 쉴 새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몇 군데의 시립 도서관에서 육아독서회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제안 이유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가진 사유를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생후 4부터 책 읽어주기를 시작해 열 살이 된 아이의 책생활에 대해 누구보다 할 말이 많았던 나는 주어진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말과 정보를 꺼내 참여자들과 소통했다.


한 해 두 해 햇수와 차시가 쌓여갈수록 나에게도 전하고 싶은 말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나만 알고 있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 살의 아이가 눈을 뜨자마자 책을 펼치는 자연스러운 아침을 또 다른 열 살 아이들에게도 소개해 주고 싶다. 글을 쓴다는 건 굉장히 놀랍고 환상적인 일이라는 걸, 단 한 번도 글다운 글을 써보지 않은 아이들과 써보고 싶다. 부모들 뿐 아니라 아이들과도 읽고 쓰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 그렇게 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강의 계획서를 만드는 일이었다.


‘쓸친들 모여라!’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구상했다. 딸아이가 직접 쓴 글을 샘플삼아 pdf 파일로 만들어 강의 계획서와 함께 도서관 담당자 메일로 전송했다. 이제는 용기를 내보기로 한다. 아이들이라서 더 필요한 읽고 쓰는 힘이 진정 자아 존중감과 자아 효능감의 원천이라는 걸 직접 보여주고 알려주려 한다.


수십 년, 지치지 않고 읽었던 시간들이, 아무도 봐주지 않지만 밥을 먹듯 잠을 자듯 당연스레 써왔던 글이 이제야 쓰임새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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